第1章
어머니에게는 규방 훈계록 한 권이 있었다.
내가 일곱 살이던 해, 변방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나를 안으려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사이를 가로막고 차갑게 말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으니, 아무리 부녀지간이라 해도 남녀의 분별은 지켜야 합니다."
그날 이후 나는 외부의 사내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금해졌고, 아버지와 오라버니와 독대하는 일 역시 허락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금기를 어기면 반드시 벌받아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범한 모든 규수의 도리에 어긋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영안 십이 년 삼 월 초엿새, 심소영은 회랑에서 큰오라버니와 단둘이 있었다. 분수를 지키지 못했으니 『여계(女誡)』를 스무 번 베껴 쓰도록 한다."
"오월 열아흐레, 심소영이 돌계단에서 넘어졌을 때 사촌 오라버니가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규수의 예법을 지키지 못했으니 두 시진 동안 꿇어앉아 반성하도록 한다."
"팔월 초이레, 심소영은 발 너머로 세자 저하를 몰래 엿보았다. 마음가짐이 흐트러졌으니 손바닥을 열 대 친다."
나는 줄곧 어머니가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이토록 엄격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외실이 낳은 심다정이 일곱 살이 되어서야, 나는 어머니가 모든 딸에게 그토록 엄격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아버지 품에 안겨 응석을 부렸고, 오라버니의 소매를 붙잡은 채 등불 축제를 구경하러 다녔으며, 사촌 오라버니의 어깨에 올라 계화를 따기도 했다.
누군가 심다정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마땅히 남녀의 분별을 지켜야 한다고 일렀으나 어머니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다정이는 마음이 순수하니, 그런 죽은 규율로 아이를 옭아매면 안 됩니다."
나는 여덟 해나 남녀의 분별을 지켜 왔다.
그리고 내가 계례를 올리던 해, 심다정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다.
혼담을 위해 찾아온 죽마고우가 그녀를 구해냈을 때, 두 사람은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서로 맞닿아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규방 훈계록을 펼쳐 내가 지난 세월 동안 저지른 잘못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세고 난 뒤, 어머니는 내 사주단자를 심다정 앞에 밀어 놓았다.
"남녀 사이에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허나 그 아이는 이미 다정이를 안았으니, 마땅히 다정이를 부인으로 맞아야 한다."
제1화
앞마당에는 붉은 비단이 가득 걸려 있었다.
서씨 가문은 돌아서자마자 혼약을 맺으러 혼수를 들고 찾아왔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정당에 앉아 경성 지도를 펼쳐 놓고 심다정의 혼수로 보낼 점포를 고르고 있었다.
큰오라버니가 성 동쪽 지역을 가리켰다.
"이곳 연지 점포가 가장 수익이 좋습니다. 다정이는 평소 분단장을 좋아하니 이곳을 주면 되겠습니다."
사촌 오라버니가 반대했다.
"성 남쪽의 옥기점이 더 낫습니다. 다정이에게 주기에도 그쪽이 어울립니다."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통 크게 손을 내저어 가장 수익이 좋은 두 곳의 점포를 모두 심다정의 이름으로 돌렸다.
나는 대청 문턱 밖에 서서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막 별당을 지나려던 순간, 뒤에서 어머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뒤,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니는 별당 태사 의자에 꼿꼿이 앉아 계셨고, 무릎 위에는 두꺼운 규방 훈계록이 놓여 있었다.
"꿇어라."
나는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푸른 벽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갑고 단단한 벽돌 바닥이 무릎을 짓눌러 아파왔다.
어머니는 규방 훈계록을 펼치며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씨 가문에서 혼약을 깨뜨렸거늘, 네 잘못을 알겠느냐?"
나는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딸은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여인으로 태어나 재능도 덕행도 없이 혼약이 깨지는 수치를 불러왔고, 후작부의 가문 명예까지 욕되게 했다."
"그런데도 네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세자 저하가 남녀 간의 예법을 무시하고 사람들 앞에서 물에 뛰어들어 심다정을 끌어안은 것은 서씨 가문의 잘못입니다."
"심다정이 스스로 선을 넘어 외간 사내의 손길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 잘못이 어찌 제게 있겠습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어머니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입 다물거라!"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혐오 가득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정이가 물에 빠진 것은 뜻밖의 사고였고, 세자 저하는 사람을 구했을 뿐이다!"
"네 마음속에 대체 얼마나 사악한 생각이 가득하기에 감히 제 동생까지 헐뜯는 것이냐?"
어머니는 재빨리 규방 훈계록에 적었다.
"구월 십이일. 심소영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심다정을 도리어 모함했으며, 투기가 지나치다."
글을 다 쓴 뒤 먹물을 말리고 책자를 덮었다.
"회초리를 가져오너라."
이 어멈은 즉시 자단목으로 만든 회초리를 내밀었다.
소란을 들은 아버지가 달려와 회초리가 내려오기 직전 어머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소영이가 당신에게 대든 것은 잘못이오. 하지만 이 벌은 너무 무겁소."
어머니는 고개를 숙여 내 앞을 가로막은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며 얼굴빛을 더욱 차갑게 굳혔다.
"후작께서는 이렇게 많은 하인이 보는 앞에서 이미 계례를 올린 딸을 감싸고 계십니다. 그 아이에게 붙은 헛소문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의 손이 순간 굳었다.
어머니가 이어 말했다.
"후작께서 오늘 그 아이 때문에 제가 세운 규율을 깨뜨리신다면, 앞으로 제가 어찌 후택을 다스리겠습니까?"
아버지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손을 놓더니, 더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천천히 문밖으로 물러나 등을 돌렸다.
어머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손을 내밀거라."
나는 저항하지 않고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내밀었다.
회초리가 사정없이 손바닥 위로 내리쳐졌다.
곧 손바닥은 부어오르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살갗 위로 번졌다.
아버지의 어깨는 분명히 떨렸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규방 훈계록을 펼쳤다.
"구월 십이일. 심소영은 연약한 체하여 아버지를 유혹하고 인륜을 저버렸으니, 회초리 스무 대를 당한다."
어머니는 책자를 이 어멈에게 넘긴 뒤, 더욱 힘을 주어 회초리를 내리쳤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입가로 피가 흘렀지만, 감히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아프다며 소리내기만 하면 규방 훈계록에는 또 하나의 죄명이 더해졌다.
그때가 되면 벌은 더욱 무거워질 뿐이었다.
스무 대가 끝났을 때, 내 두 손은 이미 살이 터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회초리를 다시 이 어멈에게 건네고, 손수건으로 천천히 손을 닦았다.
"사당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경서를 백 번 베껴 쓰도록 해라. 다 쓰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못한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몸도 따라 휘청거렸다.
곁을 지키던 몸종 해당이가 울면서 나를 부축하러 다가왔다.
나는 그 틈을 타 서신 한 통을 그녀의 손에 몰래 쥐여 주었다.
"성 서쪽 보화당, 김 의원."
제2화
해당은 피투성이가 된 내 두 손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구면서, 그저 쉴 새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초겨울 바람이 사당 문틈으로 스며들어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
나는 방석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글자 하나를 쓸 때마다 손바닥의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붓대와 선지가 붉게 물들었지만 나는 감히 멈출 수 없었다.
한밤중이 되자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다.
몸은 놀라울 만큼 뜨거웠고,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나는 차가운 제상에 이마를 기댄 채 눈앞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서 나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의 어머니는 아직 나에게 웃어 주었고, 손수 작은 저고리를 지어 주기도 했으며, 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아픈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품에 안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곁을 지키던 몸종이 아이를 가졌다.
그녀는 불러온 배를 감싸안고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울며 자신의 존재를 허락해 달라고 했고, 결국 아버지는 그녀를 집 밖에 두고 외실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난산 끝에 침상 위에서 세상을 떠났고, 갓난 여자아이 하나만 남겼다.
그 아이가 바로 심다정이었다.
경성의 귀부인들은 모두 어머니를 비웃었고, 노부인과 종족 어른들은 어머니에게 현숙하고 덕이 있는 안주인으로서, 어미 없는 아이에게 원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어머니는 울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심다정을 친딸보다 더 아꼈다.
무엇이든 내어주었고 무엇이든 감싸 주었다.
하지만 내 차례가 되면 남은 것은 규율과 벌, 그리고 끝내 다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규방 훈계록뿐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너그럽고 공정하며, 투기란 모르는 집안의 안주인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눈을 뜨려 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어멈,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아씨께서 열이 너무 높아 헛소리까지 하십니다."
"숯불이라도 조금 내어주십시오. 제가 의원이라도 모셔 오겠습니다!"
문 너머로 이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께서 아씨의 마음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이틀 동안 굶으며 성급한 기운을 가라앉히면 자연히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 세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
비단 장포 차림은 말끔하고 기품이 넘쳤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 문턱 밖에 서서,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정이는 마음이 고와서 줄곧 네가 고생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네가 원한다면, 나와 다정이가 혼인한 뒤 너를 데려와 첩으로 삼아 주겠다."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탁자 위에 놓인 벼루의 찬물을 들어 세자에게 뿌리려고 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다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세자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먼저 흐트러진 세자의 옷차림을 바라본 뒤, 사당 안에서 열에 달아 얼굴이 붉어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눈시울을 붉혔다.
"언니, 왜... 왜 은호 오라버니를 유혹하려는 겁니까?"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찬합을 손에 든 채 다가왔고, 뒤에는 이 어멈과 해당도 함께였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고, 열에 시달려 창백해진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찬합을 이 어멈에게 건넨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규방 훈계록을 펼쳤다.
"구월 십삼 일. 심소영은 제부가 될 사람을 유혹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제야 어머니는 규방 훈계록을 덮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에 서린 혐오는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너는 나를 너무 실망시켰다."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명했다.
"이 어멈, 큰아씨 창고에 있는 혼수 몇 궤짝을 모두 꺼내 둘째 아씨의 혼수로 보태거라."
그것은 외조모께서 돌아가시기 전 내 손을 꼭 잡고 남겨 주신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외조모께서 제게 주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차갑게 말했다.
"네가 여인의 도리를 지키지 못했거늘, 네 외조모께서 살아 계신다 해도 너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이다."
손에 난 상처가 다시 터졌다.
나는 목이 메인 채 입을 열었다.
"혼수 목록에는 제 이름이 적혀 있고, 외조모의 사인이 찍혀 있습니다. 외조모께서 제게 남겨 주신 물건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세게 후려쳤다.
"네 목숨도 후작부가 준 것인데, 네게 있는 것 중 무엇이 후작부의 것이 아니란 말이냐?"
어머니는 열쇠를 빼앗은 뒤에야 손을 내저었다.
"큰아씨를 방으로 데려가 가두거라.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찾아가지 못하게 하라."
두 명의 힘센 노파가 다가와 나를 끌고 다시 방으로 데려갔다.
문이 쾅 닫히며 자물쇠가 걸렸다.
나는 침상 위로 쓰러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오장육부가 함께 찢기는 듯 고통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 창문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해당이 눈시울을 붉힌 채 창틈으로 쪽지 한 장과 검은 약환 하나를 밀어 넣었다.
"아씨, 김 의원께서 이 약은 아주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먹으면 맥이 약해져 죽은 사람처럼 보일 거랍니다."
"해독약은 없으니... 스스로 세 시진을 버텨야 합니다. 버텨내면 목숨을 건질 수 있지만, 만약 버티지 못하면..."
해당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약환을 손에 꼭 움켜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3화
사흘 뒤, 후작부에서는 연회가 열렸다. 장공주께서 친히 왕림해 주신 덕에 경성의 권세가들도 절반 이상 자리를 함께했다.
상석 곁에서는 심다정이 여러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칭찬을 받고 있었다. 오늘 심다정은 곱고 사랑스럽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서씨 가문에서 보내온 붉은 보석이 박힌 금비녀를 꽂고 있었는데, 웃을 때면 마치 재잘거리는 작은 새처럼 발랄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상석에 앉은 장공주는 진귀한 백옥 여의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심다정은 갑자기 달려가 예도 올리지 않고 손을 뻗어 여의를 만지려 했다.
"이 하얀 돌 참 곱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것보다 더 광택이 도네요."
순간 장공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그녀 곁의 어멈이 즉시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무엄하십니다! 장공주마마 앞에서 어찌 이토록 예를 잃을 수 있습니까!"
심다정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떨었다.
찰나의 순간, 짤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백옥 여의가 푸른 석판 위로 떨어졌다.
희고 고운 옥으로 만든 여의는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러자 장공주는 얼굴을 가라앉히며 차갑게 비웃었다.
"후작부의 규율은 참으로 놀랍구나."
어머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심다정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어머니의 발걸음은 그대로 나를 향했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머니는 내 팔을 움켜쥐고, 나를 장공주 앞으로 거칠게 끌고 갔다.
"장공주마마, 노여움을 거두어 주십시오. 모두 제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심소영이 혼약이 깨진 일로 질투심을 품고, 뒤에서 동생을 부추겨 귀인을 거스르게 했습니다."
"지금 당장 이 아이를 엄히 벌하여 장공주마마의 분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순간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 아닙니다."
어머니는 내 뒷목을 누르던 손에 힘을 주었다.
"백옥 여의는 다정이가 깨뜨린 것입니다. 저와는 아무 상관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손바닥이 내 뺨 위로 떨어졌다.
나는 맞은 충격에 고개가 돌아갔고, 귓가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으며, 입가에는 피가 배어 나왔다.
"아직도 변명할 셈이냐!"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소매 안에 숨겨 두었던 규방 훈계록을 꺼냈다.
나는 그 책자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 십수 년 동안 쌓여 있던 모든 것이, 마침내 이 순간 터져 나왔다.
어머니가 몸을 숙이는 순간, 나는 손을 뻗어 규방 훈계록을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빼앗으려 했지만 나는 책 모서리를 죽을힘을 다해 붙잡은 채 손톱이 뒤집히고 피가 배어 나와도 놓지 않았다.
"영안 십이 년 삼월 초엿새, 심소영은 회랑에서 큰오라버니와 단둘이 있었다. 분수를 지키지 못했으니 여계를 스무 번 베껴 쓰도록 한다."
"오월 열아흐레, 심소영이 돌계단에서 넘어졌을 때 사촌 오라버니가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규수의 예법을 지키지 못했으니 두 시진 동안 꿇어앉아 반성하도록 한다."
"팔월 초이레, 심소영은 발 너머로 세자 저하를 몰래 엿보았다. 마음가짐이 흐트러졌으니 손바닥을 열 대 친다."
...
나는 고개를 들어 규방 훈계록을 어머니 앞에 치켜들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심씨 가문의 규율은 대체 딸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오직 저 하나를 벌하기 위한 것입니까?"
"이 규방 훈계록은 정말 제 잘못을 기록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저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까?"
어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입 다물거라!"
심다정은 오라버니 뒤에 숨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제가 은호 오라버니를 빼앗았다고 원망하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진 일은 제가 일부러 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저를 미워하신다 해도, 어머니까지 이렇게 모함하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주변 손님들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였습니다. 소영이가 서씨 가문에서 혼약을 파기당한 뒤 충격이 커서 가끔 헛소리를 하는군요."
"이 책자에 적힌 것은 모두 지난 세월 동안 이 아이가 저지른 잘못들입니다."
"엄하게 가르치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깊은 원한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주변 귀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독한 아이입니다."
"그러니 서씨 가문에서도 혼약을 깨뜨린 것이겠지요. 저런 아이를 데려가면 평생 편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장공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 소란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 광경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대의 후택의 추잡한 일을 따질 생각이 없다."
"허나 이 백옥 여의는 내 아바마마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다. 이미 깨졌으니, 반드시 누군가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방금 전까지 연신 사죄하던 어머니는 갑자기 나를 바라보더니, 이를 악문 채 입을 열었다.
"듣기로 평남군왕(平南郡王)께서 곧 후처를 맞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저는 이 못난 딸을 군왕께 시집보내는 것으로 사죄를 대신하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평남군왕은 이미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성정 또한 포악하기 짝이 없었다.
군왕부에서 시신이 실려 나오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미 세 명의 후처를 때려죽였다.
허니 그에게 시집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공주는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떠났다.
"그렇다면 나는 후작부의 혼주를 기다리고 있겠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두 오라버니는 심다정을 감싼 채 내원으로 향했다.
심다정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러자 큰오라버니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달랬다.
"이제 괜찮다. 다 심소영 그 악독한 년 때문이다. 오라버니가 내일 네게 탕후루를 사주마."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때 어머니가 내 앞까지 다가와 몸을 낮추고 앉았다.
"너는 모든 사람 앞에서 공평함을 요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
"이것이 네가 얻어낸 공평함이다."
어머니는 내 눈앞에서 새 장을 펼쳤다.
"구월 십사 일. 심소영은 사람들 앞에서 생모에게 대들고, 어린 동생을 모함했으며, 이성을 잃고 소란을 피워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 손바닥 스무 대를 치고, 혼인할 때까지 근신시킨다."
글을 다 쓴 뒤, 어머니는 붓을 이 어멈에게 넘겼다.
"때려라."
손바닥이 연이어 내 뺨 위로 떨어졌다.
제4화
그날 밤, 해당은 작은 보따리를 등에 메고 창문 밖에서 몰래 기어들어 왔다.
"아씨, 떠나야 합니다."
해당은 울면서 내 어깨에 두건을 걸쳐 주었다.
"서쪽 모퉁이 문밖에 오물을 나르는 수레가 있습니다. 수레꾼은 제가 이미 매수해 두었습니다."
"성 밖으로만 나가면 강남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맙시다."
나는 해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후작부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적패가 없다면 우리는 경성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해당에게 서재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보라고 했으나,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다시 내원으로 끌고 돌아가게 했다.
내 뒤로 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나는 품 안에서 검은 약환을 꺼내 삼켰다.
한 식경이 지나자, 마당에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힘센 노파 몇 명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어머니는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규방 훈계록을 펼쳤다.
"시월 열닷샛날. 심소영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밤중에 몰래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찾아가려 했다."
어머니는 책자를 덮고 차갑게 명했다.
"저 아이를 묶어라."
나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바닥에 눌리고 말았다.
밧줄은 숨이 막힐 정도로 몸을 조여 왔다.
어머니는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얌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평남군왕과의 혼사는 이미 정해졌다. 내일이면 가마가 도착한다."
"네가 따르지 않는다면 다리를 부러뜨리고 꽁꽁 묶어서라도 군왕부로 보내겠다."
바로 그때, 심다정이 눈물을 머금은 채 들어왔다.
"어머니, 언니와 몇 마디 속마음을 나누게 해 주십시오."
"내일 언니가 저보다 먼저 시집을 가니, 저도 배웅해 주고 싶습니다."
어머니 얼굴에 서린 차가움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목소리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러거라."
심다정은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숙이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 내가 그날 왜 물에 빠졌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내가 고개를 번쩍 들자, 다정이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어머니 때문입니다."
"물에 빠지던 날, 어머니께서는 미리 주변의 몸종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셨지요. 저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모릅니다."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
내가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심다정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언니, 때리지 마십시오!"
어머니는 재빨리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심다정을 붙잡았다.
곧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큰오라버니는 발을 들어 그대로 내 가슴을 걷어찼다.
"독한 년! 감히 또 사람을 해치려 들어?"
그 발길질은 너무 거세서, 나는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그러자 줄곧 창밖에 숨어 있던 해당이가 뛰어 들어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마님, 큰아씨 잘못이 아닙니다! 둘째 아씨께서 스스로 넘어지신 것입니다. 큰아씨께서는 손끝 하나 대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마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조아리는 해당을 보지도 않았다.
대신 해당의 등에 메인 보따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였구나."
"천한 몸종 주제에 감히 주인을 거짓말쟁이로 몰다니?"
어머니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심소영, 너는 줄곧 네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네가 무릎 꿇고 규방 훈계록에 적힌 죄를 인정한다면, 이 몸종의 목숨을 살려줄지 생각해 보겠다."
해당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씨, 안 됩니다..."
"인정하겠습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다정이를 질투한 것도, 어머니를 모함한 것도, 세자 저하를 유혹한 것도 접니다. 해당에게 열쇠를 훔쳐 달라고 시켜 도망치려 한 것도 모두 접니다."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제발 해당이는 살려주십시오."
어머니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꼬리를 올렸다.
"보아라. 결국 가르치면 따르는 법이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굵은 밧줄이 살 속을 깊게 파고들었고, 손목은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이미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어머니,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잖습니까!"
어머니는 차갑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생각해 보겠다고 했을 뿐이다."
해당은 나를 바라보며 눈물만 뚝뚝 흘릴 뿐, 더는 소리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붙잡고 있는 노파들 사이로 나를 향해 조용히 입 모양으로 한마디를 전했다.
"도망가십시오."
노파는 해당의 입을 억지로 벌리더니, 달궈진 인두를 천천히 그녀에게 들이댔다.
다만 인두가 닿기 직전 해당은 온몸을 뒤틀며 있는 힘껏 자신의 혀를 깨물어 끊어냈다.
피가 솟구쳐 올라 내 얼굴 위로 튀었다.
해당의 몸은 몇 차례 크게 떨리더니, 이내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나는 문득 열한 살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벌받아 눈밭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인 중 아무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지만, 해당이만은 몰래 손난로를 내 품에 넣어 주었다.
정작 자신은 열 손가락이 파랗게 질릴 만큼 추위에 떨면서도 말이다.
나는 또 매를 맞은 뒤마다 이불 속에 숨어 내 상처에 약을 발라 주던 사람이 해당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제 나를 믿어주는 유일한 아이마저 나를 구하려다 내 앞에 쓰러졌다.
거대한 슬픔이 가슴을 짓눌러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나는 바닥에 흥건한 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멀리 떨어진 베개로 옮겼다.
그곳에는 가위 한 자루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묶인 손목을 움직여 보았다.
억지로 한 손을 밧줄에서 빼낸 후, 나는 마지막 남은 정신을 붙잡고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사람들이 경악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가위를 들어 내리찍었다.
그 순간 약효가 완전히 퍼지며, 목구멍 안쪽에서 억누를 수 없는 비릿한 피맛이 치밀어 올랐다.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나는 차가운 청석 바닥 위로 무너져 내렸다.
눈을 감기 전, 나는 어머니 손에 들려 있던 규방 훈계록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심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