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부군이 변방에서 전사한 지 일곱째 해가 되던 때, 하필 그때 교지가 장군부에 당도했다.
나는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추봉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교지를 들고 온 내관이 두루마리를 펼치자,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영당 안에 울려 퍼졌다.
"진북 장군 배민후가 적군을 대파하고 개선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에 특별히 소영공주와의 혼인을 내리니, 길일을 택해 혼례를 올리라."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두가 배민후는 이미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를 대신해 몸을 쓰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혼수까지 팔아 군봉을 충당했으며, 심지어 가슴의 살점을 도려내 어린 시동생의 약에 넣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살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다른 여인을 부인으로 맞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종정시로 달려가 혼인 문서를 확인했다.
총관은 마지막 장을 펼쳐 보이다가 가엾다는 듯 말했다.
"심 부인, 배 장군은 일곱 해 전 출정하기도 전에 심 부인께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휴서를 제출했습니다."
"두 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일곱 해 전, 나는 분명 그의 아이를 품었었다.
하지만 소영공주가 말을 달려 내 가마를 들이받아 뒤엎었고, 이미 형체를 갖춘 사내아이는 끝내 내 치맛자락 아래 한 웅덩이 핏물이 되고 말았다.
그때 배민후는 나를 품에 안고 맹세했다.
"이승에서 저 여인과는 한 하늘 아래 살지 않을 것이다."
알고 보니 그가 말한 "한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는 것은 한 이불을 덮고 백년해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영당 밖에서 느긋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배민후와 대립해 온 섭정왕 서희언이 우산을 받쳐 들고 다가와, 죄증이 담긴 두루마리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심윤주, 배민후가 세운 군공의 절반은 네 심씨 가문 삼백 명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것이다."
"내게 시집오너라. 내가 친히 그자의 개선연을 뒤엎어 주마."
나는 내 손으로 배민후의 위패를 쓰러뜨렸다.
"저하, 언제 혼례를 올리실 겁니까?"
제1화
서희언이 웃었다.
그는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인 채 몸의 절반 이상을 눈보라 속에 내놓고, 마디가 선명한 손을 내밀었다.
"그대만 원한다면 언제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 위에 손을 얹고 섭정왕의 마차에 올랐다.
이튿날 새벽, 섭정왕부 밖은 철갑군이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배민후는 커다란 군마에 올라탄 채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일곱 해 만에 다시 본 그는 지난날의 풋풋함을 벗어 버리고, 미간 가득 권력자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주야, 그만 고집부리고 나와 돌아가자꾸나."
"휴서는 너를 지키기 위해 쓴 것이다. 나는 이제 부마가 되었으니 정실 자리는 반드시 공주의 것이어야 한다."
"네가 고개를 숙이고 공주마마에게 잘못을 빈다면, 너를 귀첩으로 들여 평생 지켜 주마."
나는 고개를 들어 한때 나와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맹세했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일곱 해 전 출정을 앞둔 밤, 그는 눈시울을 붉힌 채 나를 품에 꽉 끌어안고 말했다.
"윤주야, 내가 돌아오면 반드시 공을 세워 네게도 번듯한 봉작을 받아 주마. 다시는 조금의 설움도 겪게 하지 않겠다."
이제 그는 정말로 봉작을 얻어 냈지만, 그 봉작은 내 아이를 죽인 원수에게 돌아갔다.
나는 소매에서 관인이 찍힌 휴서를 꺼내 그의 얼굴에 세차게 내던졌다. 날카로운 종이의 모서리가 그의 뺨을 베고 지나가며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배 장군, 정말 역겹군요."
배민후의 낯빛이 돌변하며 막 화를 내려던 찰나였다.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소영공주가 구슬발을 걷어 올리고 입을 가린 채 교태롭게 웃었다.
"배 장군, 그대는 마음이 참으로 여립니다."
공주는 나를 위아래로 업신여기듯 훑어보았다.
독사처럼 음산하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첩이 되기 싫다면 억지로 강요할 필요는 없지요."
"제가 보기에 차라리 북방 군영으로 보내 군영 기녀로 삼는 편이 낫겠습니다. 천 명, 만 명의 사내에게 몸을 내주게 하면 제 쓸모를 다해 조정에 보답하는 셈 아니겠습니까?"
삽시간에 사방이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배민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배민후는 반박하기는커녕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윤주야, 공주마마는 성정이 솔직할 뿐이니 괜히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대의를 우선해야 한다. 네가 계속 이토록 미련하게 고집을 부리면 나조차 너를 지켜 줄 수 없다."
대의를 우선해야 한다는 그 한마디는 녹슬고 무딘 칼날처럼 내 심장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배 장군, 그대가 말하는 대의란 심씨 가문 사람 삼백 명의 시신을 짓밟고 소영공주의 더러운 발을 떠받드는 것입니까?"
배민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눈에는 당혹감과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여봐라, 심윤주를 장군부로 끌고 가 문을 걸어 잠근 채 근신시켜라!"
그가 손짓하자 호위병 둘이 성큼 다가와 나를 붙잡으려 했다.
그 순간, 섭정왕부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양쪽은 서로 칼을 겨눈 채 금방이라도 맞붙을 듯 팽팽하게 대치했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피비린내를 억눌렀다. 서희언은 오늘 입궁하여 정사를 논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그가 군사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린다는 빌미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유품도 아직 장군부에 남아 있었다.
"친히 손대실 것 없습니다. 제 발로 가지요."
나는 배민후를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다시 들어선 장군부는 전생의 흔적처럼 낯설었다.
한때 뜰을 가득 채웠던 담박한 백단향은 사라지고, 이제는 사치스러운 서역 향료 냄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배민후는 나를 억지로 끌고 대청으로 들어갔다.
"무릎 꿇고 어머니와 공주마마께 예를 올려라!"
나는 싸늘한 얼굴로 서서 대청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일곱 해 동안 대소변까지 받아 내며 봉양했던 시어머니가 언제 몸져누워 있었느냐는 듯 멀쩡히 일어나 있었다.
얼굴에는 혈색이 넘쳤고, 소영공주의 손을 붙잡은 채 연신 추어올렸다.
"금지옥엽이시다"
"살아 있는 보살님이시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는 순간, 눈빛이 더없이 매섭고 야박하게 변했다.
"애 하나 못 낳는 재수 없는 년! 거기 멀뚱히 서서 무얼 하느냐?"
"내 아들은 이제 이 나라의 부마다. 휴서를 받고 쫓겨난 계집 주제에, 어서 공주마마께 큰절을 올리고 차를 올리지 못할까?"
제2화
나는 시어머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난 일곱 해 동안 시어머니는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욕창까지 생겼다.
밤낮없이 병상을 지키며 썩은 살을 손수 도려내고 약을 바르고 몸을 닦아 준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한때 시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울면서, 나를 배씨 가문의 큰 은인이자 친딸이나 다름없는 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높디높은 공주의 비위를 맞추려고 나를 발밑에 짓밟지 못해 안달이었다.
시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네 부군을 잡아먹을 팔자가 아니었다면, 내 아들이 어찌 변방에서 그토록 고생했겠느냐!"
옆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가슴의 살점을 도려내 약재로 쓴 덕분에 저승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시동생 배지욱은 소영공주가 하사한 촉금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배지욱은 발치의 약사발을 걷어차 엎고 못마땅한 듯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온몸에서 궁상맞은 냄새가 진동하니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집니다."
"형수님... 아, 아니지. 심윤주. 네 그 푼돈 따위는 공주마마께서 하인들에게 내리는 상에도 못 미치니 썩 꺼져라. 우리 장군부의 땅을 더럽히지 말고!"
혈색 좋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에 남은 오래된 흉터가 은은히 욱신거렸다.
그때 배지욱은 고열이 내리지 않았고, 의원은 가까운 혈육의 가슴살과 피를 약재로 써야 한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거부하자 나는 칼을 들어 내 가슴의 생살을 억지로 도려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내가 더럽다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눈가에 차오른 쓰라림을 억지로 삼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시선이 한곳에서 우뚝 멎었다.
소영공주의 허리춤에 일부가 깨져 나간 짙은 녹색 옥패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심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병부로, 아버지가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던 물건이었다!
"그 옥패, 돌려주십시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 옥패를 빼앗으려 했다.
"아악! 배 장군, 살려 주십시오!"
소영공주가 비명을 지르며 가냘프게 옆으로 쓰러졌다.
"퍽!"
순간 가슴을 찢는 듯한 통증이 덮쳤다.
배민후가 내 명치를 걷어찬 것이다.
나는 줄 끊어진 연처럼 나가떨어져 자단목 기둥에 세차게 부딪힌 뒤, 선혈을 왈칵 토했다.
"심윤주, 너는 정말 사납고 막돼먹은 계집이구나!"
배민후는 놀란 소영공주를 품에 단단히 감싸고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가슴을 움켜쥔 채 온몸을 떨면서도 그 옥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의 유품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다른 이에게 준단 말입니까!"
배민후가 코웃음을 치며 멸시와 혐오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품이라? 심씨 가문은 적과 내통해 나라를 배반한 죄로 이미 폐하의 명을 받아 일족이 모조리 참형되었다!"
"이 옥패는 내가 역적들을 토벌하고 거둔 전리품이다. 공주마마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당연히 마마의 것이지!"
쾅,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진 듯 모든 생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적과 내통해 나라를 배반했다고?
일족이 모조리 참형되었다고?
내 아버지는 평생 전장을 누비며 충심으로 나라에 보답한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찌 적과 내통할 수 있단 말인가!
서희언이 내게 건넨 죄증의 두루마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심윤주, 배민후가 세운 군공의 절반은 네 심씨 가문 삼백 명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것이다."
그랬던 거구나. 그랬던 거였어!
그는 아버지의 진군 경로를 적에게 팔아넘겨 심씨 가문을 멸문시킨 뒤, 아버지의 병부(兵符)까지 빼앗아 새 주인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공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나는 짙은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가, 고개를 들어 한때 뼛속 깊이 사랑했던 배민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군, 한밤중에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심씨 가문의 원혼 삼백이 당신의 목숨을 받으러 찾아올까 두렵지도 않습니까!"
배민후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한층 더 음산해졌다.
"저 여인을 나뭇간에 가둬라!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먹을 것을 주지 마라!"
나뭇간은 음산하고 습해서 구석구석 쥐들이 뛰어다녔다.
가슴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이 쉴 새 없이 밀려와, 나는 마른 짚 더미 위에 몸을 웅크렸다.
이튿날 저녁, 나뭇간의 문이 걷어차이며 활짝 열리더니 소영공주가 시녀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제비집죽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
소영공주는 나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심윤주, 배 장군이 어찌하여 기어코 너를 이 장군부에 붙잡아 두는지 아느냐?"
나는 아무 말 없이 소영공주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네 손에 아직 심씨 가문의 살아남은 비밀 호위대 명단이 있기 때문이다."
소영공주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우리 둘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명단을 내놓기만 하면 내가 큰 자비를 베풀어 네 시신만은 온전히 남겨 주마."
나는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꿈도 꾸지 마십시오."
소영공주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제비집죽이 담긴 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사기그릇을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아악... 배가 너무 아프구나!"
제3화
소영공주는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배를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다 새빨간 피가 치맛자락을 타고 흘러내리자, 문밖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 배민후가 빠르게 들이닥쳤다.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소영공주를 본 순간, 그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공주! 공주, 어찌 이러십니까!"
소영공주는 힘없이 그의 품에 기대어 나를 가리키며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장군... 심윤주가... 제가 자기 부군을 빼앗았다며 죽에 홍화를 넣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살릴 수 없답니다...."
"독하기 짝이 없는 계집!"
배민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내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곧장 벽으로 성큼 다가가 걸려 있던 현철로 만든 말채찍을 빼 들었다.
그 채찍은 예전에 그가 아버지의 제자로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직접 내린 선물이었다.
"짝!"
날카로운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내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얇은 옷자락이 단숨에 찢어지고 살갗이 터져 나갔지만, 나는 입술을 악문 채 끝내 비명을 내지 않았다.
"짝!"
"이건 사악한 마음을 품고 황실의 후사를 해치려 한 죄다!"
"짝!"
"이건 투기에 눈이 멀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죄다!"
채찍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가 온몸에 어지럽게 얽혔고, 흘러내린 피가 나뭇간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극심한 고통에 온몸이 경련하고 연신 피를 토하면서도, 나는 처절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군... 참으로 가엾기 짝이없군요...."
그는 내 아이를 죽인 원수를 감싸기 위해 아버지가 내린 채찍으로 나를 죽도록 후려치고 있었다.
채찍이 거듭 내리꽂힐수록 지난날 품었던 애정은 조금씩 닳아 없어졌고, 마지막에는 지울 수 없는 증오만 깊이 새겨졌다.
내가 피를 토하면서도 웃음을 거두지 않자 소영공주의 눈빛에 짙은 독기가 어렸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배민후의 소매를 붙잡아 살며시 끌어당겼다.
"장군, 심씨 가문 사람들은 뼈가 워낙 굳어서 채찍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여봐라, 손가락 조이개를 가져오너라."
그건 손가락 사이에 나무 막대를 끼워 조이는 혹독한 고문 도구였다.
배민후는 피투성이가 된 나를 바라보며 잠시 채찍질을 멈췄다.
그러나 고개를 숙여 소영공주의 피 묻은 치맛자락을 확인하자, 눈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그는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 손가락을 모조리 부러뜨려라. 그래도 자백하지 않고 버티나 보자!”
곧 우락부락한 노파 몇이 달려들어 나를 꼼짝 못 하게 짓눌렀고, 열 개의 거친 나무 막대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졌다.
"조여라!"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요한 나뭇간에 유난히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악—!"
열 손가락에서 한꺼번에 치솟은 끔찍한 통증에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
더는 견디지 못한 나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눈앞이 연신 캄캄해졌다.
배민후는 내 앞에 우뚝 서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심윤주, 비밀 호위대의 명단만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 주마."
나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부러진 이가 섞인 피를 그의 얼굴에 세차게 뱉었다!
"배민후... 네놈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길 저주하마!"
배민후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차갑게 눈을 굳혔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계속 조여라!"
열 손가락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틀리고 두 손이 힘없이 축 늘어진 뒤에야, 나는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고, 나뭇간 안에는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가 가득했다.
이윽고 문밖에서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와 함께 시녀들이 낮게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마마의 분부다. 이 독한 여인은 죄가 두려워 스스로 불을 질러 죽은 것이다. 재수 없으니 흔적도 남지 않게 깨끗이 태워 버리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