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면 새로운 계절이 온다

GoodNovel new 완결

서유리가 임신 4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남편 주영훈이 갑자기 자신의 비서 소지윤을 집으로 데려왔다. “여보, 지윤이가 집에 일이 좀 생겼는데 혼자 두기가 마음에 걸려서 며칠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했어.” “당신은 임신 4개월이고, 지윤이는 7개월이니까, 둘이 같이 있으면 서로 의지할 수도 있고 좋잖아.” 20살 남짓해 보이는 여자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머금은 채 겁먹은 시선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서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 후 두 달 동안 서유리는 소지윤을 친동생처럼 챙겼고, 소지윤은 매번 어쩔 줄 몰라 하며 감동했다. “유리 언니,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비싼 수분 크림을 제게 다 주시고...” “당연하지. 우린 자매나 다름없잖아. 좋은 건 서로 나눠 써야지!” 하지만 서유리는 몰랐다. 소지윤이 말한 ‘나눔’에 자신의 남편 주영훈까지 포함되어 있을 줄은. 어느 날, 서유리는 자신의 집 주차장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반쯤 열린 차창 너머. 한 여자가 영훈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 격렬하게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쾌락에 젖은 주영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서유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주영훈이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챕터 (1)

第1章

서유리가 임신 4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남편 주영훈이 갑자기 자신의 비서 소지윤을 집으로 데려왔다. “여보, 지윤이가 집에 일이 좀 생겼는데 혼자 두기가 마음에 걸려서 며칠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했어.” “당신은 임신 4개월이고, 지윤이는 7개월이니까, 둘이 같이 있으면 서로 의지할 수도 있고 좋잖아.” 20살 남짓해 보이는 여자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머금은 채 겁먹은 시선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서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 후 두 달 동안 서유리는 소지윤을 친동생처럼 챙겼고, 소지윤은 매번 어쩔 줄 몰라 하며 감동했다. “유리 언니,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비싼 수분 크림을 제게 다 주시고...” “당연하지. 우린 자매나 다름없잖아. 좋은 건 서로 나눠 써야지!” 하지만 서유리는 몰랐다. 소지윤이 말한 ‘나눔’에 자신의 남편 주영훈까지 포함되어 있을 줄은. 어느 날, 서유리는 자신의 집 주차장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반쯤 열린 차창 너머. 한 여자가 영훈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 격렬하게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쾌락에 젖은 주영훈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서유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주영훈이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제1화 서유리가 임신 4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 남편 주영훈은 갑자기 임신한 여비서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여보, 지윤이 남편이 사고로 떠났대. 혼자 두기가 걱정돼서 며칠만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했어.” “당신은 임신 4개월이고 지윤이는 7개월이니까, 같이 있으면 서로 의지할 수도 있고 좋잖아.” 서유리는 남편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서유리는 소지윤을 친동생처럼 살뜰히 챙겼다. 임산부용 튼살 크림부터 최고급 영양제까지 아낌없이 챙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서유리는 남편을 마중하러 주차장에 내려갔다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구석에 세워진 익숙한 차. 반쯤 열린 차창 너머로 웬 여자가 주영훈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채 흐트러진 차림으로 있었다. 쾌락에 흠뻑 취한 주영훈의 표정은 서유리가 임신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얼굴이었다.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서유리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주영훈이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 굳어버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도대체 저 여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해야만 했다. 그때, 차 안의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너무나도 익숙한 옆얼굴을 드러냈다. 소지윤이었다. 주영훈이 새로 고용한 지 1년도 채 안 된 비서였다. 두 달 동안 한집에서 지내며 살갑게 ‘유리 언니’라고 부르던 바로 그 소지윤이었다. 서유리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고, 그 통증은 이내 아랫배까지 번져갔다. 그때, 소지윤의 콧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훈 씨, 내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당신 아이라는 거, 와이프한테 언제 말할 거야?” 소지윤은 주영훈의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면서 속삭였다. “나 이제 임신 9개월이야. 곧 애도 태어날 텐데 계속 숨길 순 없잖아.” 주영훈은 손을 뻗어 소지윤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목소리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곧 말할게. 지금 유리는 임신 중이라 충격을 주면 안 돼. 너도 유리도 둘 다 애를 낳고 나면 그때 말하자. 그때가 되면 유리도 별수 없을 거야.” “하긴.” 소지윤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유리 언니는 영훈 씨를 워낙 사랑하니까, 내 배 속의 아이가 영훈 씨 핏줄이라는 걸 알아도 어쩔 수 없겠지.” 그러더니 소지윤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영훈 씨, 나랑 유리 언니 중에 누가 더 좋아? 언니가 그러던데, 임신하고 나서는 언니한테 손끝 하나 안 댔다며?” “그런데 나한테는 왜 이래? 나 이제 곧 출산인데… 이렇게 무리해도 되는 거 아니야?” “당연히 네가 낫지.” 주영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렇게 몸매가 끝내주는데 어떻게 참아. 서유리는 이제 임신 6개월인데 벌써 퉁퉁 부어서 볼품도 없잖아.”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어쩐지 임신한 뒤로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더라니. 결국 서유리의 몸이 흉측해져서 보기 싫었던 거였다. 그런데 소지윤은 이미 임신 9개월이었다. 곧 출산을 앞둔 여자와 차 안에서 이따위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서유리의 억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서유리는 곁에 있던 기둥에 기대면서 간신히 버텨냈다. 하지만 그 순간, 울컥하며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적막한 주차장에 울려 퍼진 구역질 소리에 주영훈과 소지윤도 서유리를 발견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주영훈이 허둥지둥 바지춤을 추스르며 차에서 뛰쳐나왔다. “여보! 괘, 괜찮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밖은 춥다니까.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소지윤도 뒤따라 차에서 내리며 뻔뻔하게 말을 보탰다. “맞아요, 언니. 제가 오늘 대표님 일이 늦어질 거라고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두 사람이 다가왔을 때 주영훈의 바지 지퍼는 채 올려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반면 느긋하게 다가온 소지윤은 볼록한 배를 당당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승리자라도 된 듯한 기고만장한 표정이었다. 서유리가 멈추지 않고 구역질을 하자, 주영훈이 다가와 부축하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유리는 혐오감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다른 여자와 뒹굴던 그 손이 끔찍하도록 역겨웠다. “여보, 오해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주영훈이 다급히 변명했다. “이건 그냥 사고였어. 지윤이가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 모른 척할 순 없잖아.” “당신도 임신했고, 지윤이도 임신했으니까 셋이 같이 지내면 서로 의지도 되고 좋잖아. 요즘 둘이 사이도 꽤 좋아 보이던데, 안 그래?” “의지?” 서유리는 경악한 눈으로 주영훈을 쳐다보았다. 이토록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 인간이 남편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당신 진짜 미쳤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밖에서 바람피워서 딴 여자 배를 불려놓고, 뭐? 뻔뻔하게 서로 의지하라고?” “나도 당신 아이를 품고 있어, 주영훈! 벌써 6개월인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머, 언니. 어떻게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전 언니 자리 뺏을 생각 추호도 없어요.” “전 그저 영훈 씨 곁에서 묵묵히 이 아이만 잘 키우면 더 바랄 게 없다고요.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네?” 서유리에게 다가온 소지윤이 뻔뻔하게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놔!” 서유리는 소지윤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소지윤, 난 널 친동생처럼 아꼈는데 어떻게 이따위로 뒤통수를 쳐? 나 혼자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는 꼴을 보면서 아주 재밌었니?” 가볍게 뿌리쳤을 뿐인데도 소지윤은 과장된 몸짓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악!” 소지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영훈 씨, 나 배가 너무 아파... 우리 아기 잘못되는 거 아니야? 흐흑, 너무 무서워...” “걱정하지 마. 당장 병원으로 가자. 우리 아이는 무사할 거야.” 주영훈은 헐레벌떡 소지윤을 안아 들고 조수석에 태웠다. 그리고는 차에 오르기 전, 차가운 눈빛으로 서유리를 노려보았다. “서유리, 언제까지 억지를 부릴 작정이야? 경고하는데, 지윤이랑 아이가 무사하길 비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럼 당장 이혼이야!” “이혼?” 서유리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차를 응시하던 서유리는 문득 주영훈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오빠 서지호를 따라 비즈니스 연회에 참석했던 날이었다. 하얀 셔츠 차림의 주영훈은 회사 기획서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투자를 구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자산가들 중 어느 누구도 이름 모를 회사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주영훈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서유리가 그날 저녁에 주영훈이 거절당한 횟수를 직접 세어 본 것만 서른다섯 번이었다. 주영훈에게 제대로 대답이라도 해준 사람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지호가 곁으로 다가와서 짓궂게 물었다. “왜? 저 녀석 마음에 들어?” “재미있는 사람 같아서. 오빠 어차피 새 사업 파트너 찾으려고 귀국한 거잖아. 저 사람한테 기회를 한 번 주면 안 돼?” 서유리의 부탁에 서지호는 못 이기는 척 다가가 주영훈에게 명함을 건넸다. 몇 달 뒤, 서지호는 주영훈이 제법 쓸 만한 인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주영훈에게 푹 빠져 있었던 서유리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그의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가 가장 힘들었던 고비마다 서유리는 묵묵히 주영훈의 곁을 지키며 함께 버텨냈다. 마침내 JS그룹이 상장하던 날. 주영훈은 수많은 직원들 앞에서 서유리에게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했다. “유리야, 나랑 결혼해 줄래? 내 아내가 되어 줘.” “하늘에 맹세할게! 평생 당신 눈에 눈물 흘리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만약 내가 당신을 배신한다면, 천벌을 받고 이 회사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도 좋아!” 결혼 생활은 그야말로 꿈처럼 행복했다. 서유리의 위장병이 다시 도지기 전까지는. 주영훈은 서유리를 집에서 푹 쉬라고 하면서 회사에 출근하지 못하게 했고, 새로운 비서까지 따로 채용했다. 처음에는 주영훈이 워낙 다정하게 챙겨주었기에 의심조차 품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주영훈의 귀가는 늦어졌고, 셔츠에 밴 낯선 향수 냄새는 짙어만 갔다. 그럼에도 서유리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잦은 비즈니스와 접대 탓이려니 여겼다. 소지윤을 집으로 데려왔을 때조차 남편을 향한 굳건한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한밤중에 주영훈이 침대에서 빠져나갔을 때조차 그저 서재에서 잔업을 처리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야 모든 진실이 명백해졌다. 한밤중에 방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던 그 끈적한 신음소리는, 주영훈과 소지윤이 집 안 곳곳에서 뒹굴며 내던 소리였던 것이다. 바보같이 사람을 믿은 죄였다. 계산적인 놈과 얽히면 끝이 안 좋을 거라던 서지호의 뼈 있는 충고를 무시한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고 있었다. 주영훈이 먼저 이혼을 입에 올렸으니, 까짓것 원대로 해주면 그만이었다. 배 속의 아이조차 더는 품고 싶지 않았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고통을 억지로 삼킨 서유리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두 통의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는 해외에서 사업을 확장 중인 친오빠 서지호였다. “오빠, 주영훈이 바람을 피웠어. 나 이혼하고 오빠한테 갈래.” 두 번째는 다니던 산부인과였다. “중절 수술 예약할게요. 가장 빠른 날짜로 잡아주세요.” 제2화 다음 날, 소지윤은 아들을 낳았다. 주영훈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기어이 SNS에 글까지 올렸다. [10시간의 진통 끝에 무사히 태어난 우리 아이. 지윤아, 고생 많았어.] 사진 속 소지윤은 병상에 누워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서유리는 그 사진을 바라보다 헛웃음이 나왔다. 벌써부터 SNS에 소지윤의 존재를 당당하게 공개하다니. 그다음은 뭘까? 내연녀에게 본처 자리라도 내어주라고 할 작정인가? 서유리가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영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 어디야? 우리 얘기 좀 해.] “그래.” 마침 서유리도 이혼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서유리는 곧장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채 다가가기도 전에, 회사 직원들이 양손 가득 출산 선물을 들고 소지윤의 병실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소 비서가 벌써 아이를 낳을 줄은 몰랐네.” “놀랄 게 뭐 있어. 원래 임신 9개월이었잖아. 내가 놀란 건 그 애가 대표님 애라는 거지. 사모님도 이 사실을 아시려나?” “당연히 알겠지? 모르면 바보지! 예전에 대표님이 갑자기 사모님을 집에서 쉬게 하고 비서를 바꾼 게 다 소 비서 곁에 두려고 한 거잖아.” “갓 졸업한 예쁘장한 여대생인데, 나 같아도 넘어가겠네.” “대표님도 참 대단해. 낮에는 회사에서 즐기고, 밤에는 집에 가서 또 즐기고. 두 여자를 번갈아 가며 아주...” “그거 알아? 나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대표실하고 탕비실에서,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엄청 화끈하게 놀더라고.”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이따 들어가서 다들 입조심이나 해.” 직원들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서유리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주영훈은 훨씬 전부터 소지윤과 그런 관계였다. ‘회사 직원들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니.’ 서유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서유리는 꽉 쥔 주먹을 펴고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서유리를 보자 모두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던 소지윤만은 서유리를 보자 오히려 반가운 듯 미소를 지었다. “어머, 사모님. 놀라셨죠? 죄송해요. 그래도 우리 아기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이 아이, 사모님이 새엄마가 되어주시면 안 될까요?” “나중에 사모님 아기도 태어나면 둘이 의지도 되고, 친형제처럼 지내면 얼마나 좋아요.” 그 말에 서유리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나 싶었다. “나더러 오라고 한 이유가 뭐야?” “좀 진정했어?” 주영훈이 서유리 앞으로 다가오며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건 정말 사고였어. 그날 연회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윤이를 당신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그리고 아이가 생겼는데, 내가 모른 척할 순 없잖아.” “내 진심을 믿어 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야. 내 아내 자리는 영원히 당신 거라고 약속할게.” “내가 그깟 아내 자리 하나가 탐나서 당신 곁에 있는 줄 알아?” 서유리가 차가운 시선으로 주영훈을 바라봤다. 주영훈은 아직도 서유리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서 자신의 회사에 입사했고, 대표인 자신을 우러러보다 감지덕지 결혼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서유리가 자기 덕분에 사모님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지난 몇 년간 주영훈이 쌓은 인맥과 확보한 자원은 모두 서유리가 오빠에게 부탁해 연결해준 것들이었다. 서지호는 서유리가 아이를 낳는 날 귀국해서 주영훈을 만나보고, 국내의 대형 프로젝트들을 모조리 주영훈에게 넘겨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주영훈이라는 남자도 더는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럼 대체 뭘 바라는 건데?” 인내심이 바닥난 주영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오늘 같은 좋은 날에 당신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주영훈 보호자님, 소지윤 산모님. 아기 출생증명서 발급하셔야 하니까 원무과로 내려가 주세요. 출생신고에 필요한 서류도 안내해 드릴게요.” 간호사가 말을 마치고 나가자마자, 소지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흑흑...” “왜 그래?” 주영훈이 당황하며 다가가자, 소지윤은 아예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남들이 우리 아기를 사생아라고 손가락질할까 봐 무서워서 그래.” “출생증명서도 발급받고 출생신고도 해야 하는데 남들 보는 눈도 있고….” 소지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영훈이 고개를 돌려 서유리를 쳐다보았다. “여보, 지윤이 아이가 먼저 태어났잖아. 그러니까 일단 우리 먼저 이혼하자. 그리고 나중에 당신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 다시 재혼하는 거야. 어때?” 제3화 그 말을 들은 병실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직 소지윤만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유리에게 쏠렸다. 다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서유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 “정말요?” 소지윤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주영훈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영훈 씨, 나 정말 영훈 씨랑 결혼하는 거야? 나중에 다시 이혼한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한 번이라도 영훈 씨 아내가 될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유리야, 정말 고마워.” 주영훈의 감격스러운 눈빛을 마주하자 서유리가 피식 웃었다. “고마워할 거 없어. 당연한 일인걸.” “세상에, 사모님 진짜 대인배 아니야? 어떻게 내연녀한테 본처 자리를 내줘?” “내가 저 여자 뱃속의 아이였다면 차라리 태어나기 싫었을걸. 저렇게 줏대 없는 엄마라니, 너무 창피하잖아.”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도 서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혼 합의서 준비해서 줘. 서명할 테니까.” 서유리가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서유리 환자분 맞으신가요? 임신중절 수술 일정이 오후 3시로 잡혔습니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지금 바로 갈게요.” [남편분도 같이 오시나요?] “남편은 없습니다.” 통화를 마치자 주영훈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 “방금 누구랑 통화한 거야? 어딜 가는데? 그리고 남편이 없다니? 눈앞에 있는 난 뭔데?” “곧 바뀔 신분에 미리 적응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서유리는 빙긋 웃었다. “당신 아내나 잘 챙겨.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서유리의 가시 돋친 말에 주영훈은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히는 듯했다. 조금의 미련도 없이 멀어지는 서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서유리를 쫓아가려던 그때, 소지윤이 몰래 아기를 꼬집었다. “응애!”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자, 주영훈은 다급히 발걸음을 돌려서 아이를 달래야 했다. 병실 밖으로 나온 서유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내고 곧장 진료실로 향했다. ‘주영훈. 똑똑히 기억해. 오늘 일은 전부 네가 자초한 거니까, 절대 후회하지 마.’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서지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 달 뒤 출국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 뒀으니, 얼른 와서 얼굴이나 보자는 내용이었다. 비행기 티켓 예매 내역을 확인하자, 답답했던 가슴이 그나마 조금 풀리는 듯했다.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던 순간, 소지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여러 장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주영훈과 소지윤이 한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사이에는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주영훈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소지윤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누가 봐도 애틋하고 완벽한 세 식구의 모습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저 행복은 오롯이 서유리의 것이어야 했다. 심장이 날카롭게 베인 듯 쓰라렸다. 서유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가야... 미안해.” [서유리. 사실 영훈 씨는 진작에 너한테 질렸어. 꿈에도 몰랐겠지만, 그동안 당신을 안지 않았던 건 침대에서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래.] [네가 너무 재미없게 굴어서 싫증 났다나? 난 너랑 다르거든. 장소가 어디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맞춰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참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감히 사모님 자리에 앉아 봤겠어.]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메시지 알림에도 서유리는 평온한 표정으로 화면만 내려다봤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와 서유리를 불렀다. “서유리 환자분. 이제 수술 들어갈게요.” “네.” 서유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크게 심호흡한 뒤 간호사를 따라 수술실로 향했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운 서유리는 의사의 안내에 따라 자세를 잡았다. 극심한 공포에 온몸이 떨렸다.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본 마취과 의사가 부드럽게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끝날 거고, 아프지도 않을 겁니다.” 싸늘한 바늘 끝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내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수술 기구가 몸에 닿는 순간,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아가야. 다음에는 꼭 좋은 부모를 만나서 태어나.’ ‘너도, 엄마도... 다음에는 꼭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자.’ 제4화 수술을 마친 뒤, 서유리의 몸은 무척 허약해졌다. 서유리는 집에 전화를 걸어서 가사도우미에게 보양식을 끓여 병원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보온병을 들고 병원으로 향하던 가사도우미는 복도에서 우연히 주영훈과 소지윤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주머니,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사모님께서 보양식을 끓여서 병원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요.” “그래요?” 주영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보양식을 준비하라고 한 거죠?” “나 먹으라고 보낸 거 아닐까?” 소지윤이 곧장 손을 뻗어서 가정부의 손에서 보온병을 낚아챘다. “역시 유리 언니밖에 없네. 날 생각해서 아주머니한테 보양식도 부탁해주시고.” “그러게. 유리가 참 속이 깊어.” 주영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앞으로 며칠 동안 소지윤에게 계속 보양식을 끓여 주라고 가정부에게 당부했다. “그게 아니라, 대표님. 사모님께서...” “됐어요. 보양식 한 그릇 가지고 뭘 그래요. 설마 만들기 귀찮은 건 아니죠?” 소지윤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똑똑히 알아두세요. 앞으로 저는 사모님이 될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을 들어야죠.” 가정부는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주영훈이 가정부를 불러 세웠다. “온 김에 이것도 유리에게 전해주세요.” 주영훈이 이혼 합의서를 건넸다. “최대한 빨리 서명해서 나한테 가져오라고 하세요.” 잠시 후 주영훈이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유리라고도 전해주세요. 유리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 다시 결혼할 거라고.” 병실에서 한참을 기다리던 서유리는 가정부가 좀처럼 오지 않자 초조해졌다. 한참 뒤에야 가정부가 들어왔지만, 손에는 보양식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사모님, 제가 가져온 보온병을 소지윤 씨가 가져가 버렸어요. 자기 거라고 우기는데 대표님까지 그렇다고 하셔서...” 서유리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지면서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예요?” “이혼합의서예요. 대표님이 사모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나중에 다시 재혼하실 거라고도 하셨고요.” “참 빠르기도 하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혼합의서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둔 꼴이라니. 서유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 머리맡의 펜을 집어 들고 단숨에 서명했다. ‘재혼? 이번 생에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모님, 그럼 제가 다시 집에 가서 끓여 올까요?” 서유리가 차갑게 웃었다. “됐어요. 제가 직접 소지윤한테 가서 찾아올 거예요.” 서유리가 소지윤의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안에서는 소지윤이 뻔뻔하게 국물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그 서유리가 날 이길 리가 없잖아? 영훈 씨가 이미 이혼합의서까지 썼어. 이제 곧 이혼할 거야.” [그런데 서유리도 임신 6개월이라던데? 나중에 그 애가 태어나면 진짜 너랑 이혼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 아이를 태어나게 놔 둘 것 같아?” 소지윤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변했다.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없애 버릴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서유리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쾅! 서유리는 병실 문을 발로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지윤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탁자 위에 있던 보양식도 그대로 소지윤의 얼굴에 끼얹었다. “아악! 서유리, 뭐 하는 거야! 미쳤어?” “뭐 하냐고?” 서유리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 미쳤어. 남의 가정에 끼어드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오늘 똑똑히 알려줄게.” 서유리는 소지윤을 침대에서 끌어내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손을 휘둘렀다. “남의 걸 뺏는 게 그렇게 좋아? 내 남편 뺏고, 내 음식까지 뺏더니 이제 내 아이까지 죽이겠다고?” “주영훈이 눈이 삐었지. 어떻게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해?” 서유리의 손이 소지윤의 뺨을 연달아 후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지윤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놔! 네가 감히 나를 때려? 영훈 씨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미 때렸는데 주영훈이 뭘 어쩌겠어?” 서유리가 소지윤의 턱을 움켜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똑똑히 들어. 주영훈의 아내 자리는 네가 빼앗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내준 거야.” “그런 남자, 난 애초에 관심도 없어.” 서유리는 소지윤의 턱을 거칠게 밀쳐 내고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와 주영훈의 이혼 절차가 끝나기 전까지는 내가 엄연히 주영훈의 아내야.” “그러니 아주머니한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사람은 네가 아니야. 그리고 그 닭고기 수프는 내 거야. 네가 뭔데 가져가?” “너... 서유리!” 소지윤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죽여 버릴 거야!” 소지윤이 서유리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병실 밖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지윤의 발걸음이 곧바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아기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탁자 위의 베개를 집어 들고 아이의 얼굴을 짓눌렀다. 울음을 터뜨리던 아기는 이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제5화 그 모습을 본 순간, 서유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아이는 네 아이잖아!” 서유리가 베개를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소지윤이 한발 빠르게 움직이더니 베개를 서유리의 손에 억지로 떠넘겼다. “안 돼요! 유리 언니, 제발 우리 아기한테 이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분이 안 풀리면 저를 때리세요. 제발 아이는 해치지 말아 줘요!” 소지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서유리의 다리를 붙잡은 채 눈물범벅이 되어 애원했다. “손 치워! 안 놔?” 서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지윤을 발로 걷어찼다. 바로 그 순간,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바닥에 쓰러진 소지윤을 본 주영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영훈은 순식간에 다가와 서유리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만해!” 주영훈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서유리, 감히 지윤이를 걷어차? 갓 출산해서 몸도 못 가누는 사람한테 어떻게 이래? 당신 피도 눈물도 없어?” “영훈 씨, 왜 이제야 왔어!” 소지윤이 바닥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퉁퉁 부은 얼굴로 눈물을 쏟아내며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빨리 우리 아기 좀 살려줘! 유리 언니가 나 방심한 틈을 타서... 베개로 우리 아기를 질식시켜서 죽이려고 했어!” “뭐라고?” 주영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유리를 쳐다보았다. 서유리의 손에 들린 베개를 본 순간, 주영훈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짝! 주영훈이 서유리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미쳤어? 이제 갓 태어난 아이잖아! 당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어?” 따귀를 맞은 서유리는 눈앞이 핑 돌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물러선 뒤에야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런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주영훈은 어느새 손을 뻗어 서유리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 주영훈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순순히 이혼해 주겠다고 하고, 아주머니를 시켜서 지윤이한테 보양식까지 챙겨 보내더니.”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아이한테 손을 대려고 일부러 꾸민 거야? 당신도 엄마잖아! 아이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천벌 받을까 봐 두렵지도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유리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마저 산산조각 났다. 5년 동안 품어왔던 사랑이, 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숨이 턱끝까지 막혀왔지만 서유리는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붉어진 눈으로 주영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 여자 말을 믿는 거야? 내가 정말 그딴 짓을 벌였다고 생각해?” “지윤이가 자기 자식을 죽이려 하겠어? 도대체 언제까지 발뺌할 작정이야!” “영훈 씨, 빨리 와 봐!” 소지윤이 아이를 품에 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우리 아기가... 아기가 숨을 안 쉬어! 어떡해, 죽은 것 같아. 흐흑... 너무 무서워요!” 주영훈은 서유리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리고 곧장 경호원들을 불렀다. “이 여자 감시해. 난 아이 데리고 의사한테 갈 테니까. 만약 지윤이 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 아이도 세상 빛을 볼 생각 하지 마!” 쾅! 병실 문이 거칠게 닫히고, 서유리는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문 앞을 가로막은 두 명의 경호원을 보면서 서유리는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서유리는 핸드폰을 꺼내 서지호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낸 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묵묵히 기다렸다. 소지윤이 자기 가정을 파탄 낸 원수라 할지라도,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죄가 없었다. 진심으로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한참이 지난 뒤, 마침내 병실 문이 열렸다. 서유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아이는 어떻게 됐어?” 주영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지윤이 눈에 살기를 번뜩이면서 서유리에게 달려들었다. “죽여버릴 거야! 내 아이 살려내! 이 살인자 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소지윤은 미친 듯이 손을 휘두르며 서유리의 뺨을 연달아 후려쳤다. “이제 만족해? 내 아들이 죽었어! 서유리, 네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게 해줄게!” 제6화 “죽었다고?” 서유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눈앞의 소지윤을 쳐다보았다. “죽은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네 손으로 직접 네 자식을 죽인 거잖아!” “뭐라고? 이젠 나한테 뒤집어씌우기까지 해? 내가 미쳤다고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을 죽여?” “흐흑... 영훈 씨, 우리 아기 억울해서 어떡해? 제발 저 미친 여자가 제대로 죗값 치르게 해 줘!” 주영훈은 굳은 표정으로 서서 싸늘한 살기만 뿜어내고 있었다. 서유리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예전의 다정함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벌레를 보는 듯한 차가운 혐오뿐이었다. “지윤이 말이 맞아. 사람을 죽였으면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지.” 주영훈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당장 경찰서로 넘겨.”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서유리는 절망에 빠진 눈으로 주영훈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데 내가 아니야. 난 그런 짓 안 했어! 왜 내 말은 죽어도 안 믿는 건데?” 주영훈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아는 서유리라면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주영훈이 망설이자, 소지윤은 그의 팔을 꽉 붙잡고 더 서럽게 오열했다. “영훈 씨, 우리 아기가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데! 난 저 여자 감옥에 보내는 걸로는 성에 안 차. 내 방식대로 벌을 줄 거야! 안 그러면 억울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아!” 주영훈은 서유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지윤이는 너한테 넘길 테니까, 마음대로 해. 절대 안 말릴게.” 단 한 번조차 뒤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멀어지는 주영훈의 뒷모습을 보며, 서유리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주영훈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소지윤은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훔쳐 냈다. 방금 전까지의 슬픔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싸늘한 비웃음만 남았다. 짝- 소지윤이 손뼉을 치자 험상궂은 체구의 사내 둘이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 여자 끌고 가.” 소지윤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알아챈 서유리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무슨 짓이냐고? 내 아들이 죽었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준다잖아.” 소지윤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다시는 주영훈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어 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지윤이 차갑게 명령했다. “기절시켜서 끌고 가!” 그 순간, 어깨 쪽에서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서유리는 반항해 볼 틈도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서유리는 침대에 사지가 묶여 있었다. 침대 곁에는 담배를 입에 문 소지윤과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알기나 해? 난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 소지윤은 덤덤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서유리는 소름이 돋아 소지윤을 노려보았다. “너 정말 끔찍하다. 네 손으로 아이를 죽여 놓고 어떻게 이렇게 태연해?” “어차피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잡것인데 눈 딱 감고 죽여 버려야지 어쩌겠어?” “살려 뒀다가 나중에 주영훈이랑 안 닮은 거 들키면 어떡해? 일찍 죽는 게 걔한테도 나아. 덕분에 널 치워버릴 수 있게 됐으니 고마울 따름이지.” 서유리는 충격으로 굳어버렸다. 소지윤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주영훈의 핏줄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놀라?” 소지윤이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렸다. “나도 주영훈 애를 갖고 싶었는데 임신이 안 되잖아.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아무 놈 씨나 받아온 거지.” “넌 주영훈 애를 지웠다며? 참 매정하기도 해라. 하지만 괜찮아. 내가 다른 남자들로 실컷 채워줄 테니까.” 소지윤이 손짓하자 덩치 큰 사내들이 서유리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남자 다섯 명이야. 뼈마디가 부서질 때까지 뒹굴고 나면 주영훈이 널 다시 거들떠보기나 할까?” “오지 마! 저리 가!” 서유리는 밧줄로 묶인 몸을 비틀며 발악했다. 밧줄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눈앞의 공포에 비하면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다가오는 사내들을 보자 서유리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소지윤, 너 진짜 미쳤어! 주영훈이 알면 널 가만둘 것 같아?” “그래?” 소지윤이 비웃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주영훈의 이름이 떠 있었다. “잘됐네. 주영훈이 뭐라고 하는지 어디 한번 같이 들어볼까?” 제7화 전화를 받자 소지윤이 다급하게 울먹였다. “영훈 씨, 서유리가 나보고 자기를 건드리면 날 죽여버리겠대!” [아까도 말했잖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저녁에 데리러 갈 테니 같이 집에 가서 밥 먹자.] “주영훈, 소지윤이 사람을 시켜서 나를 해치려고 해! 주영훈!” 서유리가 핸드폰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주영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 뚜- 끊어진 통화 연결음과 함께 서유리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절망의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서유리는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5년이나 사랑했던 남자가 이토록 무정하고 끔찍한 인간이었다니. 평생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남자가, 이제는 내연녀가 본처를 이렇게 짓밟는 것조차 뻔뻔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다 들었어? 이제 포기했지?” 인내심이 바닥난 소지윤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서유리의 맨살이 드러난 팔뚝에 사정없이 지져버렸다. “똑똑히 들어. 내 아들을 네가 직접 죽인 건 아니더라도 너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어!” “오늘 일도 다 네가 저지른 짓에 대한 죗값이라고 생각해! 네가 주제 파악하고 얌전히 굴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막나가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다 네가 자초한 거야. 날 원망하지 마!” 서유리는 팔뚝을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며, 소지윤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소지윤, 이 미친년! 넌 반드시 천벌을 받을 거야!” “내가 천벌을 받을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은 바로 너야. 내가 주는 특별한 선물이나 얌전히 즐기시지.” 말을 마친 소지윤이 곁에 서 있던 사내들을 신경질적으로 재촉했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해? 안 덮치고!”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낄낄대며 셔츠 단추를 풀고 서유리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서유리는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올 만큼 꽉 깨물며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저었다.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돈을 줄게요. 나 돈 아주 많아요...” “네깟 게 무슨 돈이 있어?” 소지윤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가정주부가 무슨 돈이 있다고? 저 여자 말 듣지 말고 내 돈 받았으면 당장 일이나 치러!” “아니야. 난 SL그룹의 아가씨야! 우리 오빠가 서...” “입 다물어!” 소지윤의 매서운 손바닥이 서유리의 뺨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네깟 게 재벌가 아가씨? 아주 정신이 나갔나 봐? 영훈 씨가 진작에 다 말해줬어. 넌 쥐뿔도 없는 흙수저라고. 격이 안 맞아서 벌써 널 끔찍하게 질려 한다고!”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뺨을 맞은 충격에 서유리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우리 오빠가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 어디 한번 와보라고 해!” 소지윤이 싸늘하게 웃으며 지시했다. “당장 덮쳐! 더는 못 기다리겠어.” 사내들도 더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걱정 마세요. 돈까지 받았는데 우리가 딴소리를 하겠습니까? 잘나가는 주영훈 마누라는 대체 무슨 맛일지 진작부터 궁금했으니까.” “몸매가 끝내준다던데, 윗도리는 내가 먼저 깐다!” “그럼 아래는 내 차지야!” 서유리는 침대에 결박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친 손길에 상의가 찢겨 나가자, 사내의 입가에 더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럼 나부터 시작하지.” 눈가에서 절망의 눈물이 쏟아졌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사내들을 보며 서유리는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박한 년, 감히 내 남자를 뺏어간 최후가 어떤 건지 똑똑히 알려주지! 이딴 버러지들한테 더럽혀진 몸을 주영훈이 쳐다보기나 하겠어?” 소지윤이 캠코더를 치켜들고 끔찍한 장면을 촬영하려던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나면서 열렸다. 훤칠한 체격에 기품이 느껴지는 남자가 거칠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침대에 묶인 서유리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남자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남자는 경호원들을 이끌고 들어온 남자는 침대에 달라붙어 있던 사내들을 단숨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재빨리 이불을 끌어당겨서 서유리의 찢어진 옷 위로 덮어주었다. 남자의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이 곁에서 당황한 채 굳어버린 소지윤을 향했다. 이내 그의 눈빛에 서늘한 분노가 서렸다. “네가 지금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아? 죽고 싶어 환장했나 보네!” 남자가 가차 없이 소지윤의 배를 걷어찼다. 소지윤은 눈썹을 찌푸린 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너 대체 누군데 끼어드는 거야?” 경호원 두 명이 다가가 소지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곧장 서유리에게 다가간 남자가 묶여 있던 손발을 다급하게 풀어냈다. “이제 괜찮아, 유리야. 내가 구하러 왔어.” “당신은...” 서유리는 남자의 넓은 품에 안긴 채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더는 말을 이을 힘조차 없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남자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같은 여자한테 이딴 더러운 수작을 부려? 짐승만도 못한 년. 유리를 건드린 대가를 오늘 똑똑히 알려주지!” 남자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 알지? 주영훈이 널 그렇게 끔찍하게 아낀다며? 그럼 내가 그놈한테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하나 보내주지.” 그 끔찍한 말에 소지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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