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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녀는 이 사랑을 관두다
“엄마, 아빠. 결정했어요. 돌아가서 가업을 이을게요.” 딸이 드디어 고집을 꺾자 수화기 너머의 송지창과 최윤경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신분을 숨기고 만난다는 딸의 남자친구가 떠올라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친구도 같이 오는 거야? 네 정체를 아직 말 안 했지?” “같이 안 가요. 헤어질 거예요.”
챕터 (1)
第1章
“엄마, 아빠. 결정했어요. 돌아가서 가업을 이을게요.”
딸이 드디어 고집을 꺾자 수화기 너머의 송지창과 최윤경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신분을 숨기고 만난다는 딸의 남자친구가 떠올라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친구도 같이 오는 거야? 네 정체를 아직 말 안 했지?”
“같이 안 가요. 헤어질 거예요.”
제1화
노현재 얘기가 나온 순간 송정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게 가라앉았다.
“일주일 후에 이곳을 정리하고 갈게요.”
몇 마디 더 나눈 뒤 송정아가 전화를 끊고 다시 룸으로 들어갔다.
룸 안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 아주 북적거렸다. 송정아가 문을 열고 들어선 그때 시끌벅적하던 대화 소리가 잠시 잦아들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곧장 노현재의 옆으로 가 앉았다.
노현재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틈틈이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송정아를 챙겼다. 그가 나른하면서도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했어?”
송정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현장에 프랑스인이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끼어든 사람이 프랑스어로 말했다.
“노현재, 안수진이랑은 언제 결혼할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송정아가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들고 있던 술잔을 세게 움켜쥐었다.
노현재가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송정아를 힐끗 쳐다봤다가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셨어. 보름 뒤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송정아에게 꽂혔다. 그중 한 명이 눈썹을 치켜뜨며 궁금증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수진이랑 결혼하면 송정아는 어떡하고? 헤어지는 거야?”
“아니, 안 헤어져.”
노현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손에 든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가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결혼은 집안의 요구에 응하는 것뿐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정아밖에 없어.”
그 순간 룸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고 여기저기서 농담들이 터져 나왔다.
“현재 너 언제부터 이렇게 순애보였다고 그래?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데도 진짜 마음을 준 거야?”
노현재가 고개를 돌려 송정아를 바라보았다. 식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애정이 서린 눈빛이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빛으로 답을 대신했다.
지독한 사랑꾼 같은 모습에 누군가 혀를 내두르며 신기해했다.
“진짜 사랑에 빠지긴 했나 보네. 그나저나 송정아 말이야. 정말 프랑스어 못 알아듣는 거 맞아?”
무심코 던진 질문인데 사람들이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폭소를 터뜨렸다.
“송정아네 집안 형편을 몰라서 물어? 외국어를 배울 돈이 어디 있었겠어? 절대 못 알아들으니까 걱정하지 마.”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옆에 있던 송정아의 호흡이 미세하게 가빠지고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술잔을 꽉 쥐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아주 잘 알아듣는 걸 굳이 밝히지 않았다.
사실 송정아는 구박받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최고 재벌의 외동딸이었다.
지난 5년의 연애 기간 동안 노현재는 세상 누구보다 송정아를 아꼈지만 집안 어른들에게 단 한 번도 그녀를 소개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두 사람의 신분 차이 때문에 조심스러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노씨 가문이 가흠시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였으니까.
그래서 송정아는 자신이 최고 재벌의 외동딸이라고 밝힐 계획이었다.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살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부딪쳐보고 싶어 신분을 숨겼던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흘 전 송정아가 노현재의 서재에서 청첩장을 발견했는데 신부가 안씨 가문의 딸이었고 신랑은 다름 아닌 노현재였다.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는 와중에도 그는 이미 집안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한편으로 송정아를 ‘자기야’라 부르면서 달랬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집안과 어울리는, 그의 가족들이 인정한 여자와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순간 송정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노현재는 결혼을 하고 송정아는 가업을 물려받으면 된다. 두 사람에게 찬란한 앞날이 펼쳐져 있었다.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었고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다. 밤이 깊어지고서야 술자리가 끝이 났다.
송정아가 사람들을 따라 룸을 나섰다. 그런데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아 아가씨!”
제2화
송정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부른 사람이 다름 아닌 예전에 아버지 송지창과 협력하려고 줄기차게 매달리던 거래처 사람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송정아가 속으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어떻게 이 상황을 넘겨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노현재의 뒤에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송정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아가씨라니? 지금 송정아를 아가씨라 부른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걸 다 합쳐도 5만 원이나 되려나? 그런데 아가씨? 웃겨서, 원.”
그 말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프랑스어가 아니었기에 송정아도 비웃음을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난 쪽은 노현재였다. 방금 그 말을 한 사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남자가 멋쩍어하며 입을 다물었고 다른 이들 역시 노현재의 경고에 하나둘 조용해졌다.
소란이 가라앉았고 아까 송정아를 부른 사람도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송정아는 노현재와 함께 말없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후 노현재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불쑥 말했다.
“자기야, 앞으로는 그런 자리에 자기 안 데리고 갈게.”
더는 그의 친구 무리에 끼워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송정아의 표정과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여전히 무덤덤했다.
“내가 창피해서?”
노현재가 실소를 터뜨렸다. 송정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그녀가 피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변명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네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그래.”
“하지만 우리 신분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잖아.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인데. 집에서 정략결혼 하라고 압박한 적 없어?”
송정아가 노현재의 눈을 똑바로 보며 흔들리는 기색이 있는지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정략결혼이라는 말을 듣고도 노현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을 뿐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아야,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오직 너 하나라는 것만 알면 돼. 다른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면 그 미세한 굳어짐을 놓쳤을 것이다.
말을 마친 노현재가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송정아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말한 해결책이라는 게 결국 집안에서 원하는 여자랑 결혼하고 날 내연녀로 두겠다는 거야?’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협탁 위에 놓인 노현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노현재가 한 번도 그녀에게 비밀번호를 숨긴 적이 없었기에 어렵지 않게 잠금을 해제했다. 메시지창을 열어보니 안수진이 보낸 메시지였다.
[현재 씨, 내일 양가 어른들께 인사드리는 날이잖아.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않으면 어른들이 우리 가짜 결혼인 거 눈치채지 않으실까? 현재 씨가 여자친구를 사랑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요 며칠 동안만 내 체면 좀 생각해주면 안 돼?]
말투는 비굴했지만 송정아는 그 속내를 단번에 파악했다.
처음에는 양가 어른들을 핑계 삼아 안수진의 집에서 자게 하고 그다음엔 더한 요구로 노현재를 잡아두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송정아는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송정아가 휴대폰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현재가 씻고 나왔다.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이내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송정아를 쳐다봤다.
“정아야, 회사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늘 밤은 못 들어오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
급히 가느라 송정아의 반응을 살피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문 앞까지 따라 나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어 달라고 투정을 부렸을 송정아가 이번에는 멀리 가버린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노현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정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내 말 한마디면 현재 씨가 모든 걸 제쳐두고 나한테 달려오는 거 봤지? 내일이면 양가 어른들도 만나. 우리가 진짜 결혼하고 나면 넌 뭐가 될 것 같아?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도 없는 애인?]
안수진이 쏟아내는 말들이 모욕적이었지만 송정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찌르도록 칼을 쥐여준 사람이 한때 평생을 함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친구라는 점이었다.
노현재는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송정아가 그 청첩장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어차피 오래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송정아가 청첩장을 발견한 바로 다음 날, 안수진이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며칠 내내 온갖 도발적인 사진들을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현재가 안수진과 함께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사진부터 시작해 두 사람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고르는 사진, 결혼식장을 알아보러 다니는 사진까지...
끊임없이 날아드는 그 사진들이 노현재를 향한 송정아의 애정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날 밤 노현재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송정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송정아는 대충 씻고 곧바로 회사로 가서 사직서를 냈다. 퇴사 절차가 그날로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식사하던 중 평소 그녀와 꽤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하나가 그녀가 퇴사 처리를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농담을 던졌다.
“요즘 숏폼 영상 보니까 동료가 갑자기 퇴사하는 이유가 집으로 돌아가서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서라던데. 이렇게 쿨하게 그만두는 거 보면 혹시 정아 씨도 가업 물려받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송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가업 물려받으러 가요.”
사람들이 멈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그저 농담으로 여길 뿐 누구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정아도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물건을 정리하여 상자에 담은 다음 그대로 안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마침 노현재가 돌아와 있었다. 상자를 품에 안고 들어오는 송정아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회사 그만뒀어?”
고개를 끄덕이고 상자를 든 채 방으로 걸어가는 송정아의 모습에 노현재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불렀다.
“그 일 좋아했잖아. 갑자기 왜 그만둔 건데?”
송정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노현재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생겼거든.”
제3화
그 말에 노현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말했다.
“일이 힘들면 그냥 집에서 쉬어. 매일 지쳐있는 거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정아야, 내가 너 하나 못 먹여 살릴까 봐 그래?”
송정아가 고개를 저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난 누구의 부속품이 아니야.”
노현재가 순간 멈칫했다.
“부속품이라니? 무슨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회사 안 갔어?”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너랑 시간을 못 보냈잖아. 오늘은 너랑 같이 있으려고.”
노현재가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 다시 그녀에게 다정한 남자친구로 돌아갔다.
“뭐 하고 싶어? 양식 먹을래, 아니면 영화 볼래? 오늘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맞춰줄게.”
예전의 송정아였다면 이 말에 무척 감동했을 것이다.
노현재가 노강 그룹의 후계자라 매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 그가 기꺼이 시간을 내어 그녀가 원하는 걸 함께 해준다는 건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 노현재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일이 바빴던 걸까, 아니면 결혼 준비 때문에 바빴던 걸까? 대체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나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거짓말할 수가 있지?’
그러나 송정아는 끝까지 그의 거짓말을 들춰내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 남지 않았다. 때가 되면 송정아는 노현재의 인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송정아가 고개를 저으며 노현재의 제안을 거절한 뒤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대청소나 같이 해줘. 집에 낡은 물건들이 너무 많아. 계속 둬봐야 쓸모도 없고.”
노현재가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하고 오랫동안 함께 청소를 도왔다. 그러다가 정리가 끝나갈 무렵 송정아가 버리려고 빼놓은 물건들이 전부 예전에 두 사람이 함께 샀던 커플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그잔, 액세서리, 옷, 슬리퍼 등 송정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버려지는 커플템이 늘어날수록 노현재의 얼굴에 떠오르던 미소도 점차 굳어졌다.
마지막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린 그때 노현재가 마음속의 당혹감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정아 너...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내가 뭘 아는데?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어?”
송정아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노현재를 보면서 그의 질문을 교묘히 피해 되물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노현재가 시선을 피했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정면으로 대답할 수 없어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이렇게 말했다.
“정아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 기억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야.”
송정아가 피식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청소를 마친 후 노현재가 송정아를 데리고 데이트를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평소와 다른 점을 눈치챌까 봐 그녀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영화도 봤다. 그리고 차가 마지막으로 멈춰 선 곳은 어느 경매장 앞이었다.
막 입장하려던 그때 트위드 정장을 차려입고 정성스레 화장을 한 재벌가 아가씨가 그들을 향해 우아하게 걸어왔다.
노현재의 표정에 찰나의 어색함이 스쳐 지나간 걸 송정아가 바로 포착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송정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가 두 사람의 앞에 멈춰 서서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옆에 있던 노현재가 타이밍 맞게 소개했다.
“우리 집안이랑 대대로 친하게 지내는 집안의 딸이야. 안수진이라고 해.”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송정아를 소개했다.
“이쪽은 내 여자친구 송정아.”
확연히 다른 온도 차에 안수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송정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현재 씨 여자친구가 엄청 예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오늘 직접 뵈니 역시나 명불허전이네요.”
바로 그때 전날 송정아의 면전에서 프랑스어로 그녀를 조롱했던 노현재의 친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송정아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노현재에게 눈을 깜빡였다.
노현재는 그제야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그들이 일부러 안수진을 데려온 거라는 걸 깨달았다.
속에서 분노가 들끓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성질을 내면 오히려 변명하기가 더 곤란해질 터. 결국 화를 꾹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경매장에서 안수진의 자리가 노현재의 바로 옆이었다.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냈던 때와 달리 현실의 안수진은 상냥하고 교양이 넘치며 박학다식한 이미지였다.
노현재가 도자기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그 분야의 주제를 주도하며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노현재 역시 처음에는 거리를 두는 듯하다가 점차 안수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송정아가 헛기침한 뒤에야 노현재는 자신이 계속 그녀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겉옷을 벗어 송정아에게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추워? 이러면 좀 낫지? 네가 이런 쪽에 별로 관심 없는 거 알아. 혹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그냥 번호표 들어서 낙찰받아.”
송정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현재의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바로 한 줄 건너라 그들의 쑥덕거림이 고스란히 들렸다.
“현재가 송정아 체면을 제대로 살려주네. 그런데 관심 있으면 뭐 해? 쥐뿔도 모르는데. 아마 번호표 드는 법도 모를걸? 하하하.”
“당연히 모르지. 이런 상류층 경매장도 난생처음 와봤을 텐데.”
제4화
사람들이 경멸 섞인 눈빛으로 송정아를 힐끗거렸다. 소곤거린다고는 하지만 송정아에게는 일부러 들으라는 조롱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송정아는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마주칠 때면 그들은 그녀 앞에 굽신거리며 서서 아가씨라고 깍듯하게 불러야 할 테니까.
그때 이전 경매품의 거래가 끝나고 다음 물건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옥 조각상이었는데 옥의 질도 최상급이었지만 무엇보다 진행자가 옥 조각의 거장인 정각 선생의 작품이라고 했다.
소개를 듣자마자 안수진이 흥분하며 손에 든 번호표를 치켜들었다.
“현재 씨, 이건 소장 가치가 엄청나. 모레가 현재 씨 할머니 생신이잖아. 낙찰받아서 할머니 생신 선물로 드리면 딱이겠어.”
정각 선생의 이름을 들은 순간 송정아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단상 위의 물건을 쳐다보았다.
한번 쓱 훑어보고 이내 시선을 거두더니 덤덤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안수진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었다.
“저거 가짜예요.”
안수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정아를 쳐다보았다. 촌뜨기 주제에 뭘 아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옆에 앉아 있는 노현재를 의식해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웃어 보였다.
“정아 씨는 이게 가짜인지 어떻게 알아요?”
“진품은 최고 재벌가인 송씨 가문의 장녀가 할머니에게 선물했거든요.”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진품이 송정아의 본가에 있으니 단상에 있는 저 물건은 가짜일 수밖에 없었다.
송정아가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었건만 안수진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뒤에 있던 노현재의 친구들마저 노골적으로 비웃기 시작했다.
“송정아, 모르면 아는 척 좀 하지 마. 창피하지도 않아?”
“그러게 말이야. 재벌가 아가씨가 선물한 걸 네가 침대 밑에 숨어서 직접 보기라도 했어? 설마 너도 성이 송 씨라고 송씨 가문 아가씨랑 친척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일행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결국 노현재가 싸늘한 얼굴로 나서서 제지했다.
그가 송정아를 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아야, 네가 요즘 감정 관련 책을 좀 읽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감정 실력은 책만 본다고 키워지는 게 아니야. 수진 씨는 어릴 때부터 이런 경매장에 자주 다녔고 옥 조각에 관해서도 꽤 깊이 공부했으니 너보다 아는 게 많은 건 당연해.”
노현재가 심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송정아가 허튼소리를 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송정아가 코웃음만 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안수진이 무려 200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그 옥 조각상을 낙찰받았다.
안수진이 결제하러 가는 순간 송정아가 피식 웃었다. 200억 원짜리 가짜 옥 조각상을 선물로 준비했다는 걸 노현재의 할머니가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송정아는 말리지도, 더 이상 신경 쓰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정아, 충분히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뻔뻔하게 붙어있는 걸 보면 내연녀가 어지간히 하고 싶나 봐?”
목소리가 날카롭고 귀에 거슬렸다. 조금 전까지 상냥하고 교양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송정아가 덤덤한 눈빛으로 안수진을 쳐다보았다.
“안수진,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지난 5년 동안 그 사람 곁에 있었던 건 나야. 아무리 봐도 내가 내연녀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을 마친 뒤 안수진을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안수진이 놔주지 않고 차갑게 비웃었다.
“그래. 그런데 5년이나 만났는데 왜 현재 씨가 결혼하자는 소리를 안 하는지 생각 안 해봤어? 난 안씨 가문의 딸이고 현재 씨는 노강 그룹의 후계자야. 우린 집안 수준이 맞지만 넌?”
“도박에 빠진 아빠에 아픈 엄마, 구질구질하고 쥐뿔도 없는 집안 출신인 네가 현재 씨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송정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 불우한 가정사는 그녀가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노현재가 이것까지 안수진에게 말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녀가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만약 진짜 그런 집안 출신이었다면 그녀만 사랑한다던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상처를 줄 두 번째 칼마저 다른 여자에게 쥐여준 셈이 아닌가?
“확실히 안 어울리네.”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송정아가 고개를 돌려 안수진을 쳐다보았다.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답답함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두 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이니 부디 백년해로하길 바랄게.”
말을 마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려 확인해보니 어머니 최윤경이었다.
“정아야, 얼른 들어와. 가족들이 다 너만 기다리고 있어. 널 주려고 선물도 가득 준비했단다.”
“엄마랑 아빠는 외국에 있는 오래된 성 하나를 샀고 고모는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사 왔어. 영국 여왕이 썼던 거라나 뭐라나. 외삼촌도 차고에 슈퍼카를 가득 채워놓았더라...”
송정아의 복귀를 환영하기 위해 가족들이 준비한 선물을 최윤경이 일일이 나열하자 송정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저 가업을 물려받으러 가는 거지, 가산을 탕진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업을 물려받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5화
흠칫 놀란 송정아가 무의식중에 전화를 끊고 속으로 생각했다.
‘왜 다들 자꾸 이렇게 남의 뒤에서 갑자기 말하는 거야?’
고개를 돌리자마자 표정이 썩 좋지 않은 노현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예전 회사 사람들이 퇴사하고 뭐 할 거냐고 묻길래 본가로 돌아가서 가업이나 물려받겠다고 농담 좀 했어.”
노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송정아는 평소 그런 실없는 농담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입을 열려는데 송정아가 이미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돌아보며 말했다.
“안 가? 보석 경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말에 노현재는 송정아가 보석을 사고 싶어 하는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온 뒤 노현재가 이어서 나온 보석 경매품들을 전부 고가에 낙찰받았다. 예쁘게 포장하게 한 다음 송정아에게 선물했다.
손에 들린 상자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송정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난 이런 보석 평소에 안 하고 다녀.”
노현재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차차 익숙해져 봐. 돈 낭비라고 생각할 필요 없어. 다이아몬드는 내가 평생 사줄게.”
송정아가 입을 달싹였으나 하려던 말을 결국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에 이런 보석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 집에 있는 보석들이 전부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것들이었다.
경매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노현재와 송정아 일행 역시 더 머물지 않고 일어났다.
다들 각자 차를 몰고 왔으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차에 시동을 걸기 전에 안수진이 조수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수줍음이 가득한 안수진의 얼굴이 드러났다.
목소리 또한 애교가 넘쳐서 아까 화장실에서 송정아에게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현재 씨, 내 차가 고장 나버렸어. 집까지 좀 바래다주면 안 될까?”
노현재가 얼굴을 찌푸리고 거절하려는데 안수진이 또 이어 말했다.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현재 씨더러 날 잘 챙겨주라고 하신 거 잊지 않았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노현재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허락하자 안수진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이어 송정아를 쳐다보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런데 나 차멀미가 심해서 뒷자리에 못 타는데 어떡하지?”
노현재의 시선이 송정아에게 향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정아가 이미 차 문을 열고 내려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노현재가 미처 반응하지도 못했는데 그녀는 이미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려던 말이 목구멍에 턱 막혀 나오지 않아 너무나 답답했다.
고작 자리 하나일 뿐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보았을 때 송정아가 쉬고 싶다는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 안수진도 차에 올랐다. 문을 닫고 뒷좌석에서 눈을 감고 있는 송정아를 본 순간 안수진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송정아, 지금 노현재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면 뭐 어쩔 건데? 내가 원하는 건 결국 다 내 손에 들어오게 돼 있어. 노현재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그 생각에 안수진은 기분이 확 좋아졌다. 수줍게 노현재를 보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아 씨 많이 피곤한가 봐? 쉬게 둬야겠다.”
노현재 역시 송정아의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안수진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말없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송정아가 정말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차가 이미 노씨 가문 별장의 차고에 주차되어 있었고 안수진도 내리고 없었다.
노현재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깼어? 너무 곤히 자길래 그냥 내버려 뒀어.”
아직 잠이 덜 깬 송정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고는 노현재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노현재가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이미 현관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가 서둘러 쫓아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화났어? 수진 씨는 정말 그냥 우리 집안과 대대로 친분을 이어가고 있는 집안의 딸일 뿐이야. 마음에 두지 마.”
송정아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화가 아직 덜 풀린 줄 알고 노현재가 송정아를 끌어당기며 다정하게 달랬다.
“진짜 맹세코 집안끼리 아는 사이일 뿐이라니까? 자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말을 마치고 송정아에게서 풍기는 장미 향을 맡았다. 그제야 최근 한동안 그녀와 제대로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침을 꿀꺽 삼켰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 다가갔다. 그런데 송정아가 단호하게 밀어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노현재를 뒤로한 채 그대로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 생리 중이라 몸이 안 좋아.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쉴게.”
송정아가 방 문을 꽉 걸어 잠갔다. 노현재가 들어올 기회를 완벽하게 차단해버렸다.
다음 날 아침 1층 주방에서 송정아와 노현재가 함께 아침을 먹고 있던 중 송정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얼마 전에 그녀가 설정해 둔 알람이었다. 알람 메모에 부모님 뵙는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현재도 그 메모를 보았다.
예전에 송정아가 노현재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힐 작정으로 부모님에게 인사하러 본가에 가자는 말을 꺼냈었고 그도 흔쾌히 동의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송정아가 이 약속을 어떻게 취소할까 고민하던 그때 이번에는 노현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안수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휴대폰 너머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송정아에게 다가가더니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약속을 미뤘다.
“정아야, 갑자기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겼어. 다음에 너희 부모님 뵈러 가면 안 될까?”
제6화
본래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릴 줄 알았건만 송정아가 뜻밖에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마침 나도 오늘 볼일이 있거든.”
노현재가 나가고 얼마 뒤 송정아도 외출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이따가 만날 절친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후 상자마다 고스란히 담긴 명품들을 확인한 친구들이 일제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아야, 대체 어디서 이런 짝퉁들을 쓸어온 거야? 완전 진짜 같잖아.”
“진짜 맞아.”
친구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송정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짜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친구들이 반신반의하자 결국 자신의 진짜 정체를 털어놓았다.
“예전에 너희한테 아빠가 도박꾼이고 엄마가 편찮으시다고 했던 거 다 거짓말이야. 사실 나 최고 재벌가의 외동딸이거든. 이제 본가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가업을 물려받아야 해서 지금 너희랑 작별 인사를 하는 거야.”
송정아의 말을 들은 친구들이 처음엔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경악했고 마지막에는 재벌가 딸이 바로 옆에 있었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목소리가 어찌나 높은지 식당이 다 뒤흔들릴 정도였다.
잠시 후 노현재가 생각난 한 친구가 다급하게 물었다.
“너 돌아가면 노현재는 어쩌고? 노현재도 네 진짜 정체를 알고 있어?”
노현재 얘기에 송정아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옅어졌다.
“그 사람 곧 다른 여자랑 결혼해.”
“말도 안 돼!”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눈에 노현재는 보기 드문 순애보 도련님 그 자체였는데.”
“맞아, 맞아. 3년 전에 네가 월하미인꽃이 좋다고 하니까 거액을 들여 전 세계의 월하미인꽃을 사들여서 너를 웃게 만들었잖아.”
“2년 전엔 네가 독감에 걸렸을 때 수백억 원짜리 프로젝트도 내팽개치고 외국에서 날아와 직접 밤을 새워가며 너를 간호했고.”
“또 1년 전에 둘이 같이 교통사고 났을 때 트럭이 돌진하던 방향이 원래는 네 쪽이었는데 너를 지키려고 핸들을 꺾은 바람에 노현재만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져서 석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잖아.”
“그런 사람이 다른 여자랑 결혼한다고?”
과거의 일들을 듣고 나니 송정아도 기분이 묘해졌다. 그때의 노현재는 정말로 목숨까지 바칠 만큼 그녀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송정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사랑하긴 했지. 그런데 그 집안에서 내가 그 사람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결혼을 강요했나 봐. 내가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청첩장까지 다 준비해 놨더라고.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까 결혼 후에는 날 그냥 세컨드로 둘 생각인 것 같아.”
그 말에 친구들이 노발대발했다.
“뭐? 세컨드?”
“최고 재벌가의 외동딸을 세컨드로 두겠다고? 걔 미친 거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나중에 그 인간 피눈물 흘리며 후회할 날이 올 거야.”
“맞아. 네가 몰래 떠난 거 알면, 그리고 너의 진짜 정체를 알면 그 집안 사람들 미쳐 날뛸 게 틀림없어.”
바로 그때 노현재와 안수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나누던 대화를 엿들었는지 노현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짜 정체라니?”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오는 모습을 본 친구 중 한 명이 분통을 터뜨리며 한마디 하려는데 송정아가 말렸다. 그녀가 방금 들어온 두 사람에게 차갑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녀의 질문에 노현재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안씨 가문과 협력하는 사업 건이 있어서 만났어.”
대답을 들은 송정아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들이 말하는 협력이 정략결혼이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두 사람이 ‘사업 건’을 논의해야 했기에 송정아 일행과 합석하지 않고 멀지 않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송정아가 앉은 자리에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노현재가 안수진의 스테이크를 썰어줬고 그녀의 입에 뭐가 묻자 티슈로 닦아주기까지 했으며 안수진은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그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다정한 애정행각에 옆에서 지켜보던 송정아의 친구들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송정아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제7화
식사가 끝나고 송정아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노현재가 그녀와 안수진을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지난번 조수석 자리다툼이 있고 난 후 노현재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예 롤스로이스 리무진을 끌고 왔다. 전담 기사까지 대동했기에 조수석 때문에 싸울 일도 없었다.
차가 안씨 가문 저택을 향해 매끄럽게 달렸다.
사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 트럭 한 대가 반대편에서 미친 듯이 돌진해왔다.
놀란 운전기사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지만 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두 차량이 피할 새도 없이 부딪치고 말았다.
유리창이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관성에 의해 몸이 반대편으로 쏠린 그 찰나의 순간 송정아는 노현재가 옆에 있는 안수진을 품에 꼭 껴안은 걸 목격했다.
안수진이 다치지 않도록 제 몸으로 감싸 안은 채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송정아의 머릿속에 아까 친구들이 언급했던 그날의 교통사고가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이 교제한 지 4년째 되던 해였고 송정아에 대한 노현재의 사랑이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사거리였고 똑같이 폭주하는 트럭이 있었다.
트럭이 돌진해 오던 방향이 송정아가 앉아 있던 방향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 순간 트럭을 피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노현재는 트럭이 그에게로 돌진하도록 핸들을 꺾는 수밖에 없었다.
보닛이 처참하게 찌그러졌고 그는 운전석에 낀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 소방대원들과 구급대원들이 한참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야 겨우 그를 차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날 노현재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럼에도 의식을 되찾자마자 가장 먼저 송정아의 안부를 물었다.
세월이 흘러 똑같은 교통사고 속에서 이번에 그가 본능적으로 감싸 안은 이는 더 이상 송정아가 아니었다.
리무진의 뒷부분이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찌그러졌다.
탑승자들이 모두 차에서 내린 뒤에야 안수진을 진정시키던 노현재가 비로소 피가 흐르는 이마를 움켜쥐고 있는 송정아를 발견했다.
다행히 부상이 심하지 않아 병원에 도착해 처치를 받고 나니 금세 괜찮아졌다.
다만 다친 곳이 머리라 의사가 이틀 동안 입원하여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송정아를 보는 노현재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미안해. 수진 씨랑 같이 참석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수진 씨 얼굴에 상처가 나면 안 되니까 지켜줬던 거야.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 제발 날 거들떠보지 않는 것만 하지 말아줘. 응?”
제법 진심 어린 사과였고 변명 또한 그럴싸했다.
만약 송정아가 앞으로 보름도 남지 않은 그들의 결혼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말한 그 프로젝트가 결혼식을 말하는 거겠지.’
송정아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도, 용서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감정이 메마른 표정만 지었다.
노현재가 연신 사과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눈빛이 반짝거렸다.
“며칠 뒤면 네 생일이네. 생일 선물 미리 줄게, 어때? 뭐 갖고 싶어? 갖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송정아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눈빛은 여전히 잔잔한 호수처럼 아무런 파동도 없었다.
“그럼 비행기 티켓이나 한 장 끊어줘. 사흘 뒤 호양시로 가는 티켓으로.”
“호양은 갑자기 왜?”
노현재가 살짝 의아해했다가 이내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여행 가고 싶어?”
“응.”
송정아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노현재도 더 캐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휴대폰을 꺼내 호양시로 향하는 항공권을 구매했다.
구매를 마친 후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일이 좀 있어서 같이 가주진 못하지만 먼저 가서 놀고 있어. 나중에 시간 될 때 나랑 또 한 번 같이 가자. 비행기 티켓만 주기엔 생일 선물치고 너무 약소하니까 나중에 더 큰 깜짝 선물을 줄게.”
송정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소하지 않아, 전혀.”
사실 이건 송정아가 집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이었다.
‘고마워, 노현재. 직접 집으로 보내줘서.’
제8화
입원해 있는 이틀 동안 노현재는 연애 초기로 돌아간 것처럼 송정아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의 다정함도 퇴원하는 날과 함께 막을 내렸다.
노현재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기사를 시켜 송정아를 집으로 보내자마자 그녀는 안수진이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받았다.
[미안해서 어쩌지? 나 곧 현재 씨랑 결혼해. 오늘은 현재 씨가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서 식사하기로 해서 널 데려다줄 시간이 없을 거야.]
송정아는 메시지를 보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떠나는 날 그녀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이륙 7시간 전, 캐리어를 하나씩 밖으로 옮기던 송정아가 마침 집으로 들어오던 노현재와 딱 마주쳤다.
별장 앞에 캐리어가 여러 개 놓여 있는 걸 본 노현재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음속에 돌연 한 가닥의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이게 다 뭐야?”
“호양에 놀러 간다고 했잖아. 비행기 티켓도 네가 사줬는데. 그새 잊었어?”
송정아가 정말로 며칠 가볍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노현재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루 이틀 가는 거 아니었어? 짐이 왜 이렇게 많아?”
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들은 원래 이래. 예쁜 옷 많이 챙겨 가서 사진 많이 찍고 싶단 말이야.”
그러나 예전의 송정아는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뿐더러 함께 여행을 갈 때도 이렇게 짐을 바리바리 챙긴 적이 없었다.
불안감이 그의 심장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당장이라도 캐리어를 열어젖혀 정말 그녀의 말대로 옷이 들어 있는지 샅샅이 뒤져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노현재가 확인하려던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안수진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후 안수진이 무슨 말을 했는지 노현재가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집을 나갔다. 나가기 전 잊지 않고 송정아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너무 오래 놀지는 마. 돌아오는 비행기 편 알려줘. 내가 마중 나갈게.”
송정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만남이 곧 영원한 이별이었다.
이륙 5시간 전, 송정아가 현관 비밀번호를 바꿨다. 그녀의 생일에서 안수진의 생일로.
그리고 현관문 위에 포스트잇을 한 장 붙였다.
[이곳이 앞으로 안수진 씨의 집이 될 테니 비밀번호도 안수진 씨 생일로 해두는 편이 나을 거야.]
이륙 3시간 전, 그녀는 별장 안에 있던 노현재와의 사진을 모조리 찾아내어 한 장 한 장 화로 속으로 던져 넣었다.
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아래서 송정아를 끌어안고 키스하며 그의 여자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던 그 사람.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한쪽 무릎을 꿇고 평생 그녀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던 그 사람.
송정아를 살리려고 핸들을 꺾어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졌던 그 사람.
그녀의 생리 주기를 기억하고 SNS를 온통 그녀의 사진으로 도배했던 그 사람...
그렇게 그들은 함께 사계절을 보냈다.
이제 그 모든 추억이 조금씩 타들어 가 재로 변하듯 두 사람의 관계도 완벽하게 끝이 났다.
이륙 2시간 전, 송정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안수진이 보낸 동영상이었다.
동영상 속 배경이 가족 모임인 듯했다. 노현재의 친구들과 안수진의 친구들, 그리고 양가 어른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인 노현재와 안수진을 에워싸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분위기를 띄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현재야, 며칠 뒤면 결혼할 텐데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수진 씨가 먼저 하게 할 순 없잖아.”
부추기는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안수진이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눈을 감고 노현재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점점 커졌고 노현재더러 키스하라고 부추겼다.
노현재가 눈앞의 안수진을 빤히 보다가 결국 눈을 감고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쥔 채 진하게 입맞춤했다.
동영상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일곱 번째로 재생되던 그때 안수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송정아, 똑똑히 봤어? 나야말로 노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인정한 며느리야. 찢어지게 가난한 널 노씨 가문에서 받아줄 리가 있겠어? 그 정도 수준이면 거지한테나 시집가는 게 딱 어울릴 거야.]
[현재 씨가 널 사랑하면 뭐 해? 현재 씨의 방어선이 지금 나한테 조금씩 무너지고 있어. 나랑 같이 부모님도 뵙고 내 친구들도 만나고 이젠 동거까지 해. 방금 나한테 키스도 했어. 우리 얼마 후에 잠자리할 것 같아?]
송정아는 답장하지 않고 안수진이 며칠 동안 보내온 도발적인 메시지들을 한 장 한 장 프린트하여 하나로 묶은 뒤 텅 빈 거실에 뒀다.
이륙 1시간 전, 메시지를 프린트한 A4 용지 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노현재, 결혼 축하해. 우린 이제 끝이야.]
그러고는 캐리어를 끌고 별장 단지를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노현재, 난 다시 최고 재벌가의 외동딸로 돌아갈 거야. 너랑은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야!’